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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진의 DVD Sequence]옛날 옛적 그 소년


세르지오 레오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장자는 인생이 일장춘몽이라고 했다. 봄날의 선잠 같은 것, 그것이 인생이다. 이 영화엔 회한이 가득하다. 레오네가 이 영화에서 건져 올린 것은 인간에 대한 혹은 사내들에 대한 물기 어린 연민과 서정이다. 이탈리안 갱스터를 바라보는 레오네의 감성이자 성찰이다.

세르지오 레오네를 얘기할 때 느와르, 갱스터, 웨스턴, 남자, 마초의 세계를 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서부극의 최후를 인정하듯 13년 동안 침묵했던 마카로니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가 절치부심 끝에 완성한 걸작이자 유작이다. 매캐한 화약 냄새나는 수컷들의 총싸움이라는 데선 마카로니웨스턴과 다를 바 없지만, 미국 공황 시대의 댄디한 코스튬, 익스트림 클로즈업, 로트랙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우울하고 감성적인 비주얼과 미장센은 그 자체로 서정적이며 아름답다 못해 숨이 막힌다.

남자는 언제 어른이 되는 것일까. 혹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 걸까. 과연 어른이 되기는 할까? 세르지오 레오네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을 반복했던 것 같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턴> 등 그의 영화들에 등장하는 수많은 마초 캐릭터들은 사회적 구성원의 일원으로 입성하거나 성장하는 대신 퇴행에 가까운 일탈을 반복하거나 죽는다. 마치 미국계 이탈리안 마피아의 숙명처럼, 언젠간 황야에서 총을 맞게 될 총잡이의 운명처럼 패배하거나 떠난다. 먼지 날리는 황야를 벗어난 밀주 시대의 갱스터들은 한층 더 내면화되었다. 멋들어지게 돌려 넣을 쌍권총 없고 휘날릴 망토도 없이 숨고 도망치고 패배하는 연약하고 고민 많은 캐릭터가 됐다.

이 영화는 누들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한 남자의 뒤를 쫓아간다. 어려선 소년원에 수감되었고 자라서는 갱이 되었으며, 배신자의 멍에를 쓰고 동료들에게 쫓겨 다니다가 고단한 어깨로 돌아온 초로의 사내다. 이 영화엔 세 명의 누들스가 등장하는데 소년 누들스, 청년 누들스, 그리고 초로의 누들스다. 시간 구성은 순차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시선을 통해 점핑한다.

밀고자와 살인자로 몰려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하고 있던 청년 누들스가 기차역 앞에서 코즈니 아일랜드 안을 훔쳐볼 때, 그의 시선을 통해 노년의 누들스가 오버랩 된다. 머리가 빠지고 주름진 목으로 35년 만에 나타난 그는 팻시의 식당에서 회한에 젖는다.

낡은 화장실에서 문 틈으로 엿보던 데보라의 발레 공연은 다시 그를 소년 누들스로 오버랩시킨다. 원래 7시간이었다는 이 영화는 줄이고 줄여 229분으로 편집되었다.

그야말로 대하드라마인 셈인데, 그럼에도 이 영화의 압축미와 경제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완벽한 구도와 예술성, 그리고 명백한 갈등을 끌고 나가는 내러티브, 인간에 대한 탐구, 노장 감독의 깊은 시선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누들스는 가장 먼저 뚱보 팻시에게 연락한다. 어쩌면 팻시가 배신자였을지도 모르고 지금 자신을 밀고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만큼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미련 없는 막장의 심경으로 누들스는 돌아왔다.

그러나 누들스를 맞이하는 팻시의 표정은 반가움과 그리움이 교차한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어렵게 입 떼는 팻시에게 누들스는 "그저 나 피곤해" 라는 말로 일갈한다.

누들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공개되지 않은 7시간의 오리지널 버전에는 어쩌면 그간의 구구절절한 삶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르지만 로버트 드 니로의 멈칫거리는 손동작, 어느새 충혈 되고 만 눈빛만으로도 충분하다.

"난 패배자야." 누들스가 팻시에게 이런 한숨 같은 넋두리를 보낼 때 묘한 파장이 인다. 조직을 이탈한 그는 다른 세계에도 온전히 편입하지 못 했을 것이다. 외롭고 두렵고 상처받고 그리웠을 35년간의 삶, 드 니로의 대사 한 마디 그 표정이면 충분하다.

# 첫사랑

데보라의 발레 시퀀스는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힐 만큼 압도적이다. 사춘기 소년의 성적 호기심과 그를 넘어선 황홀함,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작아지는 모멸감을 동시에 담아낸다.

특히 제니퍼 코넬리는 이 짧은 발레 연기로 성인 데보라 역의 엘리자베스 맥거번의 등장을 김빠지게 만들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35년 만에 만난 팻시에게조차 데면데면하게 굴던 누들스가 지저분한 변기에 올라가 옛날 그 소년처럼 엿보던 그곳,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랑, 거기서 노년의 누들스는 소년 누들스로 오버랩 된다.

첫사랑이었고 소년원에서도 유일한 등불이었던 데보라가 그의 사랑을 받는 대신 할리우드행을 택하자 그는 극단적으로 돌변한다. 프러포즈를 거절당하고 난 뒤 차 안에서의 강간씬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사랑의 방법을 배우지 못한 그는 세월이 지나도 일방적인 것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지. 그래서 누들스는 너무도 마초적인 동시에 아이처럼 안쓰럽다.

# 페기와 케이크

소년들이 모여 있을 때 여자들은 한갓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신문 가판대에 불을 지르고 갱들과 어울려 사업을 도모하는 아이들은 더 이상 예쁘게 봐줄 수만은 없다. 이 시퀀스는 역시 세르지오 레오네! 찬사을 뱉어내게 만든다. 푸딩 하나면 섹스를 한다는 어린 창녀 페기에 대한 소문은 공공연하다. 섹스를 하기 위해 펫시의 가게에서 생크림 케이크를 산 소년은 아침부터 페기를 찾아 간다.

그러나 잠시 기다리는 사이, 케이크의 달콤한 향에 매혹된 소년은 야금야금 종이에 묻은 크림을 찍어 먹다 결국 케이크를 다 먹어치우고 만다. "날 찾았니?" 페기가 뒤늦게 나와 물을 때 소년은 허겁지겁 소매로 입을 닦으며 도망치기 바쁘다. 별 것 아닌 이 장면이 주는 건 정서적 파장이다.

그들이 속한 세계가 어떻든 그들이 누구와 사업을 벌이건 간에 아직 그들은 케이크의 달콤함을 견디기 어려운 어린 아이일 뿐이다. 이 장면이 아니라면 이 영화가 이렇게 입체적인 공감대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 출연 로버트 드 니로, 제임스 우즈, 엘리자베스 맥거번 |1.85:1 아나몰픽 와이드스크린 | 돌비 디지털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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