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한번볼래?]'어른도감'★★★★

엄태구·이재인 주연…'부녀 가장 사기극'의 결말은


[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열네 살 경언(이재인 분)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자신을 삼촌이라 말하는 아저씨 재민(엄태구 분)이 미심쩍다. 아빠가 오래도록 병과 싸우는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면서,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에 느닷없이 올라타 영정 앞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굴 때부터 그랬다.

그러더니 이제 정말 홀로 남겨진 경언의 집에 찾아와 때아닌 친한 척이다. 안 그래도 믿음이 안 가는 타입인데, 아니나다를까 아빠의 보험금과 조의금에 대해 묻는 얼굴이 뻔뻔하기도 하다. 이 '자칭 삼촌'은 외식사업 투자를 유치 중이라며 어떻게든 목돈을 만들어야 한단다. 할 말 다 하는 소녀 경언은 어물쩍 유산을 가로채려는 재민의 술수에 순진하게 넘어가진 않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혼자가 된 그에게 마땅한 보호자란 삼촌 재민 뿐이다.

어쨌든 경언은 여차저차 자신의 법적 후견인이 된 재민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가 말로만 셰프를 꿈꾸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괜찮은 요리 실력을 자랑한다는 사실도, 언젠가 '고구려'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 '유리왕자'로 불렸다는 '흑역사'도 알게 됐다.

경언은 그가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의 여성들의 마음을 흔드는 방법으로 사업 자금을 만들려 한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 파렴치한을 간단히 '제비'라 부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때는 늦었고 이미 재민은 보험금을 날려버린 뒤다. 적반하장으로, 경언을 자신의 딸로 오해한 시선에 묘한 연민이 어리는 것을 본 재민은 경언에게 부녀 가장 사기극을 제안한다.

영화 '어른도감'(감독 김인선,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FILMS))은 예기치 않게 동행을 시작하게 된 중학생 경언과 삼촌 재민이 조금 낯선 방식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또 서로를 통해 조금 다른 세계를 알아가는 이야기다. 원했든 그렇지 않든,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 속 재민의 행동들은 부도덕하고 얼마간 위선적이다. 무엇이 그의 진짜 감정인지 그 자신조차 헷갈려 하는듯한 모습은 질풍노도에 가깝다. '어른도감'의 한 인물이 사춘기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중학생 조카가 아닌 재민으로 보인다.

복잡하고 예민한 성장을 겪는 재민의 변화에는 예상치 않게 자신의 일상을 파고들어 잊고 있던 양심을 거세게 두드린 조카 경언이 있다. 나쁜 행동을 하지만 충분히 나쁘진 못해서, 재민은 거의 고꾸라질 뻔했던 자신의 도덕성을 건드리는 아이의 말들에 무던할 수만은 없다. 아주 속물적인 의도로 시작된 만남이라 해도 때로 그 안에서 연민이 싹트고, 그것이 얇게 저며진 애정이 되고, 또 책임감의 얼굴을 한 어떤 감정으로 전화한다는 것을 재민은 뒤늦게 깨닫는다.

경언은 가짜 투성이였던 재민의 세계에 작고 반짝이는 진짜의 관계를 가져다준다. 또래에 비해 빨리 철이 든듯 보이는 경언은 아빠의 오랜 투병으로 외롭고 단조로웠을 일상 속에서 많은 순간 홀로 성장했을 아이다. 손바닥 위 '참을 인'을 세 번 그려 고독을 삼켜내는 움직임이 빠르고 익숙하다. 어딜 봐도 믿을 구석이 하나 없는 인간이지만, 삼촌이라는 존재는 경언이 집 안에서도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 줄 유일한 대상이다. 경언은 정말로 '고아'가 되어버린 지금,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어 나갈 것인지를 재민과의 일상 속에서 고민한다.

두 인물의 가파른 변화 가운데에는 '동네 약사' 오점희(서정연 분)가 있다. 재민은 날려버린 돈을 어떻게든 메꾸겠다는 일념으로 산악회 모임에 참석해 점희와 안면을 튼다. 홀로 딸을 키운 싱글대디인 양 경언을 대동해 약국에 찾아가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면서 점희와 가까워진다. 재민에겐 오로지 돈을 얻어내겠다는 일념 뿐이지만, 경언은 진솔하고 따뜻한 점희를 보며 그를 속이고 있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재민과 경언은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떨어져 살게 되고, 이내 재회한다. 아이만도 못한 어른 재민은 일방적 이별을 택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불화로부터 시작된다. 이 양심적이고 귀찮은 존재와 이별하고 싶지만 마음 한켠에선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재민은 경언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을 멈춘 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라 믿고 싶다. 혹은 그렇게 보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멋쩍은 애정'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이에게 간파당하는 재민의 바보스러움은 이 영화를 마지막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오글'거리지도, 눈물을 쏟게 만들지도 않지만 감정은 아주 잔잔히 물결친다.

영화를 이끈 두 배우 엄태구와 이재인의 활약은 '어른도감'이 담백하고도 따스한 가족 영화로 완성되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그간 느와르 색채에 꼭 어울리는 배우로 자주 언급됐던 엄태구는 '어른도감'을 통해 코믹한 생활연기까지 무난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임을 보여준다. 단편 영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이어 또 한 번 엄태구의 '웃는 연기'를 볼 수 있음이 즐겁다. 엄태구는 오는 추석 영화 '안시성'에서 또 다른 얼굴로 관객을 만난다.

2004년생 배우 이재인이 그려낸 경언은 아역과 성인 연기자의 작업 결과물을 다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유의미한지 되묻게 만든다. '아역'이라는 수식어 앞에 의아해지고, '앞날이 기대된다'는 표현이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단편 영화 '장례난민' 속 엄마의 관과 함께 남겨진 소녀로 분해 강렬한 인상을 풍겼던 그는 한층 더 성장한 연기로 '어른도감'의 든든한 축을 맡는다. 감정을 크게 터뜨리지 않아도,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아도, 이재인의 연기엔 매 순간 인물의 눈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재인은 올해 개봉 예정인 영화 '사바하'에서 모두를 놀라게 할 변신을 선보일 전망이다.

재민의 사기극에 얽히게 되는 점희 역 서정연은 단편 '수요기도회'에 이어 장편 '어른도감'으로 김인선 감독과 재회했다. '수요기도회'에서와는 전혀 다른 색채의 인물이지만, 오점희 역 역시 마치 처음부터 서정연을 위해 준비된 캐릭터인듯 인상적으로 완성됐다. 내내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수요기도회'에 서정연과 함께 출연했던 배우 김새벽은 카메오로 출연해 반가움을 안긴다.

'어른도감'은 지난 23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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