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주는 여자', 이재용이 지금 여기를 기록하는 법(인터뷰)

"영화, 단순한 허구 아냐…시대상 반영한 기록물"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본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죽여주는 여자'는 할 말이 많은 영화다. 종로 인근에서 성(性)을 팔며 살아가는 노인 여성 소영(윤여정 분)의 삶을 통해 고령화 시대에 닥친 현실적 사회 문제들을 꼬집고, 그의 이웃 청년의 일상으로는 편견을 내면화한 장애인의 표정을 담아낸다.

이들이 사는 건물의 주인인 트렌스젠더 여성, 소영의 손에 이끌려 이들과 함께 지내게 되는 코피노 소년의 등장도 의미심장하다. 이쯤 되면 감독이 마치 이 사회의 소수자로 분류되는 여러 층위의 사람들을 부러 한 명씩 모아 서로를 만나게 한 것도 같다.

'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를 연출한 이재용 감독은 앞서 언급한 이 인물들을 더없이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다를 것도, 틀릴 것도 없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는지를 가만히 비춘다. 대한민국 사회를 살며 만만치 않은 풍파를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과장 없이도 관객의 가슴을 묵직하게 파고든다.

이재용 감독은 조이뉴스24와 만나 "내가 영험해서가 아니라, 살다보면 세상이 읽히지 않나. 내 머릿속에 이 이야기가 떠오를 만큼은 연륜과 경험이 쌓인 것 같다"는 말로 성매매 여성의 삶을 그린 이 영화를 연출한 계기를 알렸다.

이어 "그래서 이 영화를 빨리, 부지런히 만들기 위해 서둘렀다"며 "시간이 필요한 영화들은 그만큼 시간을 둬야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 코피노, 기지촌 여성,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연구들을 미리 알고 있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선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로증에 걸린 아들과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두근두근 내 인생'이나 페이크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신선함을 안긴 '여배우들' 같은 작품도 관객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에 앞서 관객으로 하여금 이재용이라는 감독을 또렷하게 기억하게 만든 작품은 '정사'나 '스캔들' 등 무거운 성애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죽여주는 여자'를 통해선 죽음이라는 사건들을 도처에 둔 한 여인의 이야기를 건넨다.

"이전의 성애 영화들에서 다뤘던 것은 금기시되는 사랑 이야기였어요. 그건 영원한 주제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생각해보면, 죽기 전에 뭔가 이뤄야 해서 달려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죽음이라는 블랙홀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잖아요. 그 두 개가 나의 큰 주제인 것 같아요. 간간이 형식적 실험 영화가 있었으니, 그 둘이 맞닥뜨린 것이 이 영화라 할 수 있죠. 성을 팔며 죽음으로 인도하는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이니, 내가 관심있는 두 주제가 딱 만난 경우인 것 같아요."

'여배우들'과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 등을 함께 작업하기도 했던 배우 윤여정은 '죽여주는 여자'로 또 한 번 감독과 만났다. 이재용에겐 절친한 동료이자 믿음직한 선배인 윤여정은 이번 영화가 완성될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감독은 "소재가 떠오르는 순간 그것이 나의 관심사와 만났고, 내 옆에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있었다"며 "아마 그 분이 안 한다고 했다면 나도 이 영화를 안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윤여정이란 배우가 표현하는 할머니(소영)를 보고 싶었어요. 그 분이 아니라면 영화의 톤도 달라졌겠죠. 소재를 택하는 순간 자동으로 배우도 정해졌어요."

이하 이재용 감독과 일문일답

-죽여달라는 노인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소영의 결정에 어떤 설득력을 부여하고 싶었는지 궁금하다.

"소영에겐 살려는 의지가 있었다. 티나(안아주 분)와 도훈(윤계상 분)과의 관계도 있었다. 일생이 고난이었지만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한국전쟁 직전 태어나지 않았나. 고아가 되고, 식모가 되고, 공장에서도 일하고, 양공주도 됐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몸소 체험한 여인이다.

소영에게 아이를 버린 기억은 평생 죄책감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을 죽이는 일이 해서는 안될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해 줬다. 여리고 자비심 있는 여성인 것이다. 남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 감히 도와줄 수 없는 일까지 할 수 있던 것은 그녀가 그만큼 생명력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소영이 마지막으로 임진각에 가 자신이 태어난 그 너머를 볼 때는 이미 자신이 죗값을 치를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버린 원죄에 대해 죗값을 치르려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에 삽입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모습, 백남기 농민과 관련한 뉴스 장면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촬영 당시 가장 뜨거운 뉴스가 실제로 백남기 농민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라는게 단순히 허구의 드라마가 아니지 않나. 당대를 담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시대상을 반영하게 된다. 언젠가 이 영화를 들춰보면 '저 시대가 저랬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상균 위원장의 모습은 그날 촬영을 가기 전엔 예측을 못했다. 그런데 우리 영화를 위해 비켜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실제 그 날 그런 일이 벌어졌고 그냥 기록해놓자고 생각했다.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뉴스와 이야기도 영화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요소라 생각했다. 2015년 9~11월에 저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지 않겠나."

-소영이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여성이라는 사실과 극 중 필리핀 여성-코피노 소년의 존재는 20~30년의 시대적 간격을 두고 서로 호응하는 설정으로 보인다. 제3세계 여성들이 반주변부 혹은 중심부 국가의 남성들로부터 어떤 존재이며, 또 그런 문제가 이 여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에 대한 비판적 고민이 엿보인다.

"코피노 아이가 아니라, 베트남 여성과 한국 남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로 설정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대가 맞지 않더라. 그래서 코피노로 갔다. '양공주'라는 존재를 엄밀히 학술적으로 이야기하면 사실은 미군 성 위안부다. 일본군 위안부로 불렸던 분들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분개해야 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지만, 사실 미군 위안부들의 삶에 대해선 여러 이유로 언급하지 못했다. 당시 나라는 성매매를 금지시켜놓고 그 곳(미군기지촌)에 여성들을 공급하지 않았나."

-극 중 트랜스젠더 티나 역 안아주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감독은 이재용 감독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인가.

"그 역은 실제 트랜스젠더가 해야한다고 내가 고집했다. 주변에서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를 시켜야 한다고들 이야기했는데 그건 절대 반대였다. 물어 물어 수소문해 찾았는데, 운이 좋았다. 추천을 받아 만났는데, 설정했던 50세가 다 된 트랜스젠더 역과 나이차도 크지 않더라. 안아주는 연기 경험이 없었다. 극 중 티나처럼 살았더라. 무대 연출도 하는 사람이다. 극 중 안무도 안아주가 직접 짰다. 평소처럼만 해 준다면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생각하며 믿고 갔다. 믿음이 이뤄진 셈이었다. 끼가 있었다.공연을 하며 지내온 시절들을 통해 뭔가를 연기해 낸 것이다.

안아주를 캐스팅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트랜스젠더들이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대부분이 술집이다. 한국에서 다른 여성들이 하는 일을 그들은 할 수가 없는 거다. 사회적 진출이 봉쇄돼있으니 그 중에서도 진짜 소수자인 것 같았다. 안아주가 자신의 출연으로 조금이나마 이런 환경의 변화에 일조할 수 있다면, 대중에게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호감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간 독특하고 실험적인 영화들과 대중적 색채를 지닌 상업 영화들을 오가며 연출을 했다. 이전 인터뷰에선 양쪽을 오가는 감독으로 기억될 것 같다고 했는데 이 생각에는 변화가 없나.

"사실 누가 돈만 대 주면, 돈 안 되는 영화 중엔 할 것이 많다. 실험적인, 컨셉츄얼한 아이템도 있고 사회성 있는 이야기도 있다. 상업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건 좋다. 나는 그런 면에서 운이 좋은 것 같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해오진 않았다. 그만큼 호기심이 많은 거다. 관심사가 많고, 기회가 될 때 밀어 부치는 성격이다."

-영화 속 다큐멘터리 감독의 태도와 소영의 응대도 인상적이다.

"극 중 감독은 할머니들의 치열한 삶을 겉으로만 알고 더 알아보려 하지만, 한끗차이로는 자극적으로 그들의 삶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극 중 감독이 모습을 희화화한 것은 '내가 그러고 있지는 않나' '내게 과연 그 분의 삶을 찍을만큼의 자격이 주어질까' 그런 것을 질문해본 셈이었다. '이런 죽음을 다룬 영화가 혹시 어떤 파장을 미친다면 나는 감당할 수 있는가'도 고민했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제작했는데, 어떤 면에선 정부의 돈을 쓴 영화다. 정부로서는 껄끄러운 소재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죽여주는 여자'가 세금을 낸 분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회를 위해 이런 것들을 공론화해야 할 때 아닌가. 당면한 문제가 많지만 노인 문제는 너무 시급하다. 어떻게 곪아터질지 모르는 현실이라 생각한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이영훈기자 rok6658@joy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