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정병길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영화 '악녀'는 "처음부터 모험"이었다. 그 이유를 말하며 '여성 원톱의 액션물'이라는 사실 외 더 긴 설명을 붙일 필요는 없어보인다.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주연 상업 영화의 탄생이 얼마나 드문 일이었는지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로 상업영화 데뷔식을 성공적으로 치렀던 정병길 감독은 차기작 '악녀'에서 특기인 액션을 활용하되 쉽지 않은 길을 택했다. 살인병기로 길러진 최정예 킬러 숙희(김옥빈 분)가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음모를 깨닫고 복수에 나서는 것이 영화 '악녀'(감독 정병길, 제작 앞에있다)의 줄거리다.
여성 주인공이 극 전반을 끌고가는 주요 수단은 액션이다. 한국영화계에서 흔히 만나지 못했던, 특히 최근 충무로에선 투자부터 쉽지 않아보이는 패키지였다. 날개 단 액션을 펼친 숙희 역 김옥빈, 검증된 연기력을 지닌 신하균과 김서형, 루키 성준까지, '악녀'는 도전을 밀어붙인 감독과 출중한 배우들의 만남으로 숨결을 얻었다.

누구도 완성을 보장할 수 없었던 '악녀'라는 영화를 흔들림 없이 끌고 간 감독의 과감함은 어쩌면 그의 흥미로운 생애사에서 길러진 덕목인지도 몰랐다.
축구선수가 되겠다며 운동장을 달리던 시골 소년 정병길은 실력의 한계를 일찍이 깨닫고 다른 재능을 찾아나섰다. 아들의 능력이 특별하지 않음을 알아챈 부모님의 만류가 있어 다행이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언젠가 '극장 간판을 그리며 돈을 버는' 좋은 가장이 되겠다는 꿈을 꿨지만 이 직업은 머지 않아 거의 사라졌다.
삼수 끝에 대학엔 입학하지 못한 채 군에 입대했다. '아무래도 예체능으로 먹고 살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에 더해, 왠지 그림보단 영화 일에 흥미가 생겼다. 감독보다는 배우가 되기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대 후엔 액션스쿨에 들어갔고, 무명 배우가 성공한 수기를 읽으며 마인드 콘트롤을 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배우 정병길'을 캐스팅하지 않았다. 영화 전공 대학생들의 단편영화 오디션에서도 매번 낙방했다. 그러다 질문을 품었다. '저 학생들도 감독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25세에 영화를 독학했다. 대학 생활에 바빠진 친구들 대신 비디오대여점 사장님을 친구로 삼았던 백수 청년 정병길은 혼자 연기도, 연출도 하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만든 작품이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특기생으로 늦깎이 입학을 했지만, 졸업은 못했다.
그런 정병길이 만든 세 번째 장편 영화가 '악녀'다.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두루뭉술한 질문은 어느덧 확신이 됐다. '악녀'가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히는 칸국제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으면서, 조금 더 단단한 자신감을 얻게 됐다. 그리고 감독은 말한다.
"남들이 안한 걸 해보고 싶어요. '한국에서 이런 거 안돼'라고 하면, 저는 해보고 싶어요. '이런 건 우리나라에서 못 만들어'라고 하면, 그걸 해보고 싶은거죠. SF 장르도 그렇고요. 할리우드 같은 자본은 없지만, 참신하게 접근한다면 SF가 꼭 블록버스터여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안정적인 것보단 새로운 것에 끌려요."

이하 정병길 감독과 일문일답
-'악녀'의 오프닝 액션에선 숨소리만이 인물의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차피 얼굴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진행되니, 숨소리가 궁금증을 유발할 것 같았다. 숨소리만으로 성별이 구분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칸영화제 버전에선 중간에 얼굴 실루엣이 보이기도 하는데, 개봉 버전에서는 그 장면이 날아갔다.
숨소리가 조금 더 매력적으로 보이면 어떨까 생각했다. 거친 호흡에 관객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옥빈이 후시녹음을 굉장히 잘 한다. 보통 쉽지 않은데, 잘 하더라. 비가 오는 신은 모두 후시를 해야 하는데, 그런 장면들에서도 김옥빈은 모든 소리를 똑같이 잡아냈다.
그에 더해, 엔딩에서 숙희의 웃음소리를 빼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못 빼겠다'며 소리를 줄이는 것으로 타협했다.(웃음) 그리고 그 웃음 소리에 (엔딩크레딧의) 글씨가 안 어울려서, 손글씨로 내 이름의 글씨도 바꿨다. 웃음 소리를 빼자는 반응에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울까'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그 부분에서 거의 엄청난 연출을 했다.(웃음) 타협을 위해 연출력을 발휘했다."
-주연 김옥빈에 대한 호평과 칭찬은 이미 자자하니 김서형과 성준 캐스팅에 대해 묻고 싶다.
"친구들과 등산을 가는데, '오늘 누가 오냐'고 했더니 김서형 배우가 온다더라. 왠지 산을 잘 탈 것 같아서 '잘 타시려나' 생각했는데, 잘 못 타셨다.(웃음)"
-극 중 권숙 역에 캐스팅하기엔 오히려 김서형이 기존에 보여준 이미지를 답습하는 느낌이 들 수 있었는데.
"산에 올랐다가 함께 막걸리를 먹으며 느낀 건 '이 사람이 센 사람이 아니구나'였다.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센 이미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권숙에게도 이중적인 면이 있는데, 그런 면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더라. 만약 내가 그 등산을 가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실제로는 굉장히 귀여운 분이고, 코미디언처럼 사람을 웃기는 걸 좋아하는 분이다. 한 번은 나와 조은지 배우가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놀다 술기운에 전화해 '오실래요?' 했더니, 오셨다.(웃음) 거기서부터 재밌었는데, 와서는 술 먹은 사람처럼 노시더라. 조은지와 내가 너무 많이 웃었다."
-현수 역에 성준을 캐스팅한 이유도 궁금하다.
"평소 드라마를 잘 안 보는데, 인연이 되려 했는지 성준이 나온 SBS 드라마 '상류사회'를 봤었다. 제주도에서 글을 쓰며 한 달을 살았던 때인데, 답답한 마음에 '바다를 보면 글이 써질까' 싶어 내려갔지만, 자꾸 사람들이 놀러와 술만 마셨다.(웃음) 다들 '글은 술을 먹어야 나오지 않냐'라며 술을 먹자는데, 그게 너무 자주 반복됐다.
당시 내 낙이 '상류사회'를 보는 거였다.(웃음) 재밌더라. 나중에 성준이라는 배우가 현수 역을 하면 잘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업영화에서 처음 해보는 큰 역할이라 좋아했던 것 같다. 칸에 초청됐을 때 모든 배우들이 좋아했다. 김서형 선배는 우셨고 김옥빈도 방방 뛰었다. 성준은 무덤덤해보였지만 내심 좋아했던 것 같다. 실제 칸에 가선 정말 좋아하더라. 매스컴에서 보던 것과 실제 느낀 것 사이에 차이가 컸던 것 같다. 칸 일정 후 '보석같은 경험이었다'며 고맙다고 이야기해주더라."
-다음 영화 계획은?
"코미디를 해보고 싶다. 장르는 구분하지 않고 찍고 싶은데, 액션 영화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살인범이다'가 있어 '악녀'에 대해서도 '투자해볼테니 마음대로 해보세요'라는 행운 같은 제안을 받을 수 있었다. '배우 누가 캐스팅돼야 투자가 된다'는 그런 조건이 없었다. '시나리오도, 배우도, 터치 안할 테니 하고싶은 대로 해봐'라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여성 원톱 영화를 할 수 있었다.
코미디 영화는 내가 찍으며 행복할 것 같다. '악녀'는 힘든 작업이었다. 늘 부상의 위험이 있으니 긴장의 연속이었는데, 코미디는 다칠 위험은 없지 않겠나.(웃음) 액션은 하루 몇천만 원 짜리 신도 있고, 못 찍으면 다음날 돈을 '따따블'로 책임져야 할 때도 있다. 코미디는 회차가 늘어도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현장 자체가 웃기지 않겠나. 그 디렉션을 하는 일이 재밌을 것 같다. 같이 웃고 떠들며 만드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정소희기자 ss082@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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