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을 열자 살갗에 닿는 바람이 탈지면 알코올을 바르는 것처럼 싸하다. 운달산 정상에서 골짜기로 파고드는 바람이다. 김룡사에서는 스님들이 눈을 감는 시각이 되면 그제야 바람이 눈을 뜬다고 언젠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기억이 나는 것이다.
법성선사.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김룡사에 와서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다. 어머니 49재 때도 법성선사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니 어떤 인물인지 전혀 그려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때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김룡사의 넓은 방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설선당이 아닐까 싶다. 흰옷을 입은 어머니는 잿빛 승복을 입은 법성선사에게 인사를 시키며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얘가 헌이에요. 헌아, 스님이시다. 인사드려라."
지금도 기억나지만 어머니는 절대로 아버지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의 무슨 말끝에선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자 스님이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김룡사에 오더라도 부처님께 절이나 하고 돌아가시오."
"네, 스님"
스님은 휑하니 나가버리고 덩그러니 어머니와 단둘이만 그 넓은 방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이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만나지 말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 다른 스님 편에 소식을 듣는지는 몰라도 가끔 법성선사의 안부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헌은 비록 자신에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오늘까지 그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금선대로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동광과 여자가 나가버린 빈 방에서 강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출판업을 하는 사업가다. 그리고 법성선사는 수행을 하는 선사다. 너무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부자간이다. 나의 목적은 사업을 확장시켜 성공하는 것이고, 법성선사의 목적은 아마도 수행을 잘하여 부처가 되는 일일 터이다. 그래서 법성선사와 나는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지 모른다. 이런 야속한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가버렸다. 서로 오가기에는 세월의 강폭이 너무 넓어져버렸다고 인정해야 한다. 손나팔을 만들어서 "스님!" "헌아!"하고 크게 소리쳐도 서로에게 들릴 것 같지 않은 것이다.
강헌은 아까 동광처럼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었지. 금선대로 가서 꼭 법성선사를 친견하라고 말이지. 하지만 내 사업이 망하기를 바라는 법성선사를 만나고 싶지 않았었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쨌던가. 부르르 떨면서 오기가 치받쳐 회사로 나가 밤을 새우지 않았던가.

작가메모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십여 년 전에 썼던 작품이다. 어느 해 가을날 김룡사를 다녀온 뒤 그 절의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그런 적막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듯이 그려본 작품이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목을 메이게 한다. 그런데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도 목을 메이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적막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곳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식사하는 여러 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 작품을 딱 한 번 보여준 기억이 난다. 한 선생은 그때 '자네도 이제 소설 귀신이 됐구먼.'하고 웃으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일기 쓰듯 썼기 때문에 완성도나 작품성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적(불교적) 소재를 차용한다 해도 문학적 보편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사숙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후다라쿠 항해기」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도달해 보고 싶은 기술이다.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