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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소설] 북으로 흐르는 강 <9> - 정찬주


조이뉴스24가 단편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언제나 맑고 선명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 이야기를 즐겨 들려주는 정찬주 작가가 이번에는 집요하고도 진득한 문장으로 지나간 시대의 아픔을 말해 줍니다. 소설에 담긴 비극은 분명 과거에 속한 것이지만 새로운 모습과 형태로, 아니 더욱 강고하게 현재를 지배하고 있기에 바로 오늘의 이야기 우리의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편집자]

봉옥은 아버지를 닮아 고집이 셌다. 그리고 성깔이 괄괄해서 싸움도 잘했다. 빨갱이 자식이라고 놀려댔다가 혼난 아이들이 많았다. 사내고 계집아이고 가리지 않고 함께 뒹굴어 코피를 흘리게 하거나 물어뜯어 혼을 내주곤 하였다. 최 노인도 자기 딸이지만 봉옥의 고집을 꺾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봉옥은 근력이 대단해서 봉래만큼이나 논밭 일을 거들기도 하였고, 우물 관리를 스스로 맡아 하기도 하였다.

봉옥은 아낙네들이 논밭에서 묻혀온 흙먼지를 우물 가까이서 씻지 못하게 했다. 또 가뭄이 들었던 해에 몰래 논에다 물을 대던 박 씨가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던 사건도 있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부아를 가라앉히면서 봉옥이네 우물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윗마을 우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언제나 맑은 물이 철철 넘쳐났고, 아무리 가물어도 손 한 뼘 가량 주는 게 고작이었다. 더욱이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심한 땀띠도 물 몇 바가지 끼얹으면 그만이었다.

"오빠, 지가 현소를 만나 사정해 보겄소."

봉래는 대답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봉옥이 도회지 나가 돈을 좀 벌었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아 부아가 치미는 것이었다. 봉옥은 현소 집을 찾아간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이제는 현소와의 관계가 말끔히 청산된 터이므로 시비 가릴 게 없었다. 어른들의 아집을 생각지 않고 그들끼리 결혼을 약속했던 젊은 날의 어리석음도 이제는 다시 반복될 수 없을 것이었다.

현소가 장가가는 날, 현소 집안사람들은 큰 잔치를 벌였다. 빨갱이의 자식인 봉옥과의 염문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잔치 행각에 현소는 만취가 되어 소란을 피웠고, 며칠 뒤 봉옥은 물 탄 농약을 마시고서는 자살 소동을 벌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 후에도 계속 몰래 관계를 갖다가 현소 아내한테 들키고 말아 종내는 봉옥이 마을을 뜰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현소의 집 앞에서 봉옥은 잠시 멈추었다. 돌담 밖으로 가지를 뻗은 감나무 이파리들이 녹음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뜻밖에 담 너머에서는

현소의 숙부가 현소를 어르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오고 있었다.

"현소야, 내 생각으로는 봉옥이라는 년이 돈 좀 벌었다고, 지 아부지 소원 풀어주겠다고 우리 산을 사겠다고 덤빌지도 모르겄어야. 그런데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지 않냐. 너에게 말은 안했다만 형님 유택이 북향이어서 늘 맘이 깜깜했었는디 잘 됐지 뭐냐. 그랑께 넌 봉 옥이와 예전 정분도 있고 허니 발을 빼고 있그라. 내가 잘 알아서 처리헐팅께. 속 아는 사내끼리 못할 얘기가 뭐 있겠느냐."

"숙부님 뭔가 잘못 알고 허시는 말씀 아닌기라우? 최 노인이 거기에 묻히고 싶은 것은 아부지헌테 정말로 속죄하고 싶어서 그란다고 헙디다만."

"어허, 이 숙부가 누구냐? 내 말귀를 아적도 못 알아듣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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