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면 동호의 추측대로 회사가 자금난에 봉착하면서부터 박 주간은 철저하게 연극을 해왔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박 주간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마다 그를 도와준 사장의 은혜를 염두에 두고 그랬을 것이었다.
이내 술좌석은 성토장으로 변해갔다. 윗사람들이 순서 없이 한 사람씩 불려나와 호되게 얻어터졌다. 동호와 철민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아무렇게나 그들을 나무라곤 했다.
벽시계가 어느새 저녁 여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술꾼들이 비로소 몰려들고 있었다. 동호는 그들을 무시한 채 악을 써댔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가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시 구절을 중얼거렸다. 노래를 부르듯 두 팔을 휘저으며 암송을 했다.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끊임없이 불타고 있는데
그대는 암흑에 둘러싸인 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동호는 같은 구절만 녹음테이프처럼 반복했다. 마침내, 동호는 술에 흠뻑 취해 고개를 꺾고 말았다. 문득문득 눈앞의 사물들이 물방울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도 탁자도 벽도 술병도 보이지 않고 뿌연 안개를 이루는 것이었다.
물방울들은 미친 듯이 떠돌며 어른거렸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햇빛이 눈부시게 몇 줄기 내리꽂히자 물방울들은 힘을 잃으며 다시 변신을 서두르고 있었다. 대부분 왜소하고 몽상에 잠긴 듯한 술꾼들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동호는 옆자리 술꾼들의 소리를 들었다.
"굉장한 화재였어. 니기미, 대낮부터 타죽은 연놈들은 또 뭐야."
"재수 없게 재가 돼버린 거지요."
"구경꾼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는 거야. 젠장헐."
동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어슴푸레 벽만 보일 뿐이었다. 마치 벽 속에서 누군가가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것만 같았다.
철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철민은 어느새 길바닥으로 기어나가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거리는 쌀쌀했다. 그리고 하늘은 심연처럼 어둡고 적막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동호는 차갑고 축축한 것이 살갗에 부딪힘을 느꼈다. 낮 동안 어디에선가 숨어 있다 살금살금 기어 나온 안개임이 분명했다.
동호는 정류장을 지나쳐 버렸다. 그냥 집까지 걸어가고 싶은 것이었다. 집까지는 버스 정류장을 무려 일곱 군데나 거쳐야 했다. 그러고 나서도 산비탈 골목길을 이십여 분이나 더 걸어 올라가야 했다. 동호는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아직도 정신은 몽롱한 상태여서 환시 같은 것이 문득문득 일어나곤 했다. 거리의 크고 작은 불빛들, 그 것들이 어떤 때는 곧 터질 듯한 꽃망울로 보이면서 눈앞에까지 다가와 어른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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