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 후 동호는 역 광장을 지나 공사장 부근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호각소리가 삐익 삐익 들려왔다. 경찰과 과일행상 간에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파의 소리가 더 당당했다.
"야 이놈아!"
"벌써 몇 번쨉니까. 할머니."
"이놈들아. 네 놈더러 뭘 달랬어. 내가."
노파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때마다 더욱더 악에 받친 얼굴을 경찰 쪽으로 디밀었다.
"이러지 마세요. 할머니. 정말."
"네 놈들이 뭐길래 남의 밥그릇에 발길질이냔 말이여."
"이건 할머니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노파와 가까운 곳에 있던 과일 행상들은 벌써부터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후다닥 달아나고 있었다. 대부분 젊은 부인들이었다.
"다 먹고 살기 위해 이 짓 하는 거엿. 못된 놈들 같으니라구."
동호는 정신이 번쩍 되살아남을 느꼈다. 잘 익은 사과 하나가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순간 동호는 그 사과가 보기 싫어 반사적으로 피해 버렸다. 동호는 다시 걸음을 떼었다. 포클레인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지르며 둔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갈처럼 생긴 그것은 동호의 눈에 흙만 파먹고 사는 괴물로 보였다. 동호는 좀 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도 노파의 가시 돋친 음성은 자꾸만 뒤쫓아 오고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이 짓 하는 거엿!"
대책이 없는 악순환이었다. 약육강식의 현장이었다. 모두가 생존 경쟁의 고해(苦海)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서로의 먹이 때문에 벌어지는 투쟁의 연속인지도 몰랐다. 크고 작은 벽을 뛰어넘지 못한 자는 언제나 패자일 것이었다. 동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동호는 늘상 패자인 셈이었다. 남들이 수월히 타고 넘는 벽조차도 동호는 뛰어넘지 못했다. 스스로 잘해 보겠다고 다짐은 늘 새롭게 하지만 결과는 매번 낭패였다. 쓰디쓴 뒷맛을 남겼다.
첫 번째 직장. 그곳은 학교였었다. 소위 일류대학이 있기 때문에 교직원 전원이 몸살을 앓아대는 남고였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언제나 지당했다. 조회 때마다 지겨움을 참기 위해 동호는 '교장선생어록'을 만들어 나갔다.
불만은 갖되 표현은 하지 말라. X월 X일.
교사는 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X월 X일.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X월 X일
…….
아무튼 동호가 그만 둔 직접적인 이유는 학생주임과 언쟁을 벌였던 게 화근이 되었다. '급훈' 때문이었다. 동호는 자기 반의 급훈을 짓기 위해 꽤나 신경을 썼었다. 지금까지 귀가 따갑게 들어온 급훈이나 교훈, 심지어는 군대시절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강조 사항까지도 떠올려 보았다. 정직·성실·충성·실천·초전박살……. 그러나 하나같이 고리타분한 것들뿐이었다. 너무나 낯익은 추상명사들이었다. 할 수 없이 동호는 한 문장으로 그것도 의문문의 급훈을 짓고 말았다.
그것은 '이런 일이 있어도 좋은 것일까?'였다.
학생들은 대찬성이었다. 학생주임만이 반대를 해왔다. 학교의 비리에 초점을 맞춘 급훈으로 오해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교장, 교감도 그랬다. 그때 동호가 받았던 심적 타격은 교직에 대한 회의로까지 번져버렸다. 결국 급훈은 바뀌고 말았지만 '이런 일이 있어도 좋은 것일까?'라는 의문문은 동호 자신의 물음으로 남고 말았다. 증권회사는 두 번째 직장이었다. 동호는 운수 좋게도 자료실로 배치되었다. 교사로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한가한 곳이었다. 근무 중에도 회사를 슬쩍 빠져나가 동료들과 당구나 탁구 같은 게임을 은밀하게 즐길 수도 있었다. 도대체 직장으로서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고작, 경제관계 세미나가 열리는 대학 강당이나 호텔 회의실 같은 곳을 찾아가 자료나 책자를 수집해 오는 것이 동호의 주 임무였다. 너무나 한가했기 때문에 사표를 쓰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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