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김양수 기자] 역시 관록의 이혜영이었다. 이혜영은 13년 만에 돌아온 무대 위에서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여자' 헤다를 명징하고 설득력있게 표현했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지만, 헤다의 낯선 행동마저도 안쓰럽다고 느끼게 만드는 건, 결국 배우의 힘이었다.
국립극단의 연극 '헤다 가블러'는 "탕!" 단발의 총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객석은 완벽하게 암전되고, 무대 위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든다. 무대 위에는 커다란 쇼파가 존재한다. 2막까지 이어지는 동안 무대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각각의 존재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극을 풍성하게 만들어낸다.
![연극 '헤다 가블러' 이혜영 [사진=국립극단 ]](https://image.inews24.com/v1/66ee7489fb5178.jpg)
공연의 주인공은 부유한 장군의 딸 헤다 가블러다. 헤다는 충동적인 결혼 후 지루함과 권태로움을 느끼는 인물. 2012년 초연 당시 쏟아지는 호평 속에 '한국의 독보적인 헤다'로 거듭난 이혜영은 13년 만에 다시금 불꽃 헤다로 무대를 뜨겁게 불살랐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위태롭게 걷는 헤다의 눈부신 추락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완성했다.
연극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헤다를 추앙한다. 남편 예르겐 테스만(김명기 분)은 헤다를 "고급" "정말 대단한 여자"라고 치켜세우고, 고모 율리아네 테스만(고수희 분)은 "헤다는 까다롭고 예민하지"라면서도 "헤다는 늘 멋지지, 예쁘지"라고 선망의 눈빛을 보낸다. 헤다의 학창시절 친구였던 엘브스테 부인(송인성 분)은 헤다와 자신을 비교하며 "난 그냥 싸구려"라고 절망한다. 하지만 정작 헤다는 "내 시대가 가버렸다"며 "(이제 남은 건) 죽도록 지루해 하는 것"이라고 토로할 뿐이다.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던 헤다는 전 연인 에일레르트 뢰브보르그(김은우 분)의 학문적 성공 앞에 질투를 느끼고 혼란을 느낀다. 박정희 연출은 에일레르트의 원고를 불태우는 헤다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아이를 잃은 엄마의 감정을 투영했다. 원고를 품에 안고 아이 대하듯 어르고 달래고 자장가를 부르던 헤다는 결국 화롯불에 이를 태워버리고, 이후 자신의 배를 움켜쥐며 소리를 지른다. 헤다의 혼란스러운 심리상태가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장면이다.
극중 헤다 못지 않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브라크 판사(홍선우 분)다. 당초 캐스팅됐던 윤상화가 개막 전날 건강이상으로 쓰러지면서 급하게 대체된 홍선우는 마치 원래 제 배역이었던 것처럼 흔들림없는 연기를 선보인다. 단 이틀 만에 대사를 다 외우고 일주일 만에 동선까지 다 뀄다는 홍선우의 놀라운 집중력과 연기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연극 '헤다 가블러' 이혜영 [사진=국립극단 ]](https://image.inews24.com/v1/adab65a04f848d.jpg)
13년 만에 'Pick 시리즈'로 돌아온 '헤다 가블러'는 여전히 전석 매진을 기록 중이다. 이혜영과 함께 13년 만에 다시 연출을 맡은 박정희 연출은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도 21세기판 헤다들은 존재한다"라며 "자아의 본질을 찾고자 헤매는 오늘날의 헤다들에게 우리는, 그리고 사회는 어떤 손을 내밀 수 있는가를 질문해보고 있다"고 작품의 의미를 전했다.
6월1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러닝타임 160분(인터미션 포함) 15세 이상 관람가.
/김양수 기자(liang@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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