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박상욱 기자] 예술가 서광일을 소개하는 일은 언제나 망설여진다. 그를 시인이라 부르면 무대 위의 울림이 멀어질 것 같고, 배우라 부르면 언어의 밀도가 희미해지는 것 같다. 그는 등단한 시인이면서 25년 넘게 연극 무대를 지켜온 지독히도 우직한 배우다. 그러나 이 서로 다른 이력은 그에게 분열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예술가입니다. 인간을 바라보고 다루는 일이라는 점에서 시와 연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규정하기보다 인간을 관찰하는 태도를 이야기한다. 시와 연기라는 두 장르는 그에게 서로 다른 도구일 뿐, 지향하는 바는 같다.

- 시는 ‘삐딱한 시선’에서 시작된다.
서광일의 시에는 자주 주변부 인물들이 등장한다. 외국인 노동자, 도시의 출구,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표정들. 그의 첫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역시 이러한 장면에서 태어났다. 대학로 4번 출구에서 우연히 마주친 외국인 노동자의 눈빛, 그리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황급히 도망치던 그 장면은 하나의 시가 되었다.
“시인은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부족한 부분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성된 것보다 완성되지 않은 것,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선은 명확하다. 완전한 중심이 아니라, 약간 비켜난 자리. 그곳에서 인간은 가장 솔직해진다.

- 몸으로 건너는 세계, 연기라는 노동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면, 연기는 신체의 예술이다. 서광일은 연기를 “몸을 내어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무대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몰입해야 해요. 계산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거든요.” 그는 여전히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소설을 소리 내어 읽으며 발성과 호흡을 다듬는다. 관객 앞에 서기 전,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몸과 언어를 조율하는 시간이다. “연기는 매번 다릅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보장해주지 않아요. 그 불안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죠.”
- 경계를 허무는 창작 방식
서광일은 말한다. “시를 쓰듯 연기하고, 연기하듯 시를 쓰고 싶다!”고.
그는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연극에서는 서사를 설명하기보다는 시처럼 몽타주 방식으로 장면을 제시하고 싶다고 말한다. 반면, 시를 쓸 때는 배우처럼 완전히 감정에 몰입하고 싶다고도 한다. 그에게 경계란 지켜야 할 선이 아니라, 건너야 할 지점이다.
- 흑백의 시대를 지나온 청춘, 그리고 그 선택
전북 정읍에서 보낸 학창 시절은 거칠었다. 그는 그 시절을 영화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 사이쯤에 놓인 시간이라고 회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그의 피난처였다. 음악 다방에서 흘러나오던 글과 음악, 그리고 시화전을 통해 처음 써본 시!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은 가족의 반대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길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확신보다는,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 슬럼프를 통과하는 법, 그리고 ‘재미’
30년 가까이 예술의 현장에 있었지만, 그는 지금도 슬럼프를 말한다. 기회를 갈망하며 스스로를 소모했던 시간, 인정받고 싶다는 조급함. 그러나 결국 그를 붙잡은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즐거움이요. 문장이 정리될 때의 희열, 무대에서 관객의 호흡을 느끼는 순간. 그게 없었다면 벌써 그만뒀겠죠.” 예술은 고통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즐거움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 현실의 문학과 예술을 향한 생각
그는 오늘의 문학을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새로움을 찾다가 너무 모호해진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시가 암호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의 말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예술이 다시 인간에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에 가깝다. 시와 연극이,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

- 후배들에게
인터뷰 말미, 그는 후배 예술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당부를 남겼다.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준비 하세요. 결과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나를 넘어서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예술이 다시 사람을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서광일은 여전히 경계 위에 서 있다. 언어와 몸 사이, 중심과 주변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그는 인간을 바라본다. 그의 예술은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낮고 조용한 자리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의 얼굴을 오래 응시한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시인이자 배우로 살아가는 이유일 것이다.
복 숭 아
서광일
비닐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딪쳐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다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 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만에 사 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 흐르는 단물까지 빨아 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껏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수원=박상욱 기자(sangwook@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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