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박상욱 기자] 화려한 런웨이의 이미지와 달리, 디자이너 이시안의 작업실은 조용하다. 오래된 나무 가구와 책, 원단 더미가 놓인 이 공간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요즘 시대와 잘 맞지 않는 진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패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승부사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시대를 깊이 고민해온 사유가 먼저 느껴진다.

그녀는 자신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브랜드를 경영하는 사업가이자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포장하거나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는 여전히 어색함을 느낀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녀의 이미지 역시 전략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주변의 기록과 해석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것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성향에서 비롯된다.
- 내향성에서 비롯된 감각
이시안은 어린 시절부터 극도로 내향적인 아이였다. 열 살 무렵까지 부모님 이외에는 거의 다른 사람과 말을 하지 않았고, 주목받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회피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몸으로 받아들이는 편에 가까웠다. 불안은 늘 일상에 가까웠으며, 감정의 흔적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났다. 의외로 그의 유년 시절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패션 키드가 아니었고, 가장 자신 있었던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었다. 암기해야 하는 과목은 늘 불안했지만, 수학은 원리만 이해하면 답이 명확했기에 편안했다고 회상한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디자인을 대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시안에게 창작은 감정의 즉흥적 발현이 아니라, 구조를 끝까지 파고드는 사고 과정이다.

- 우연히 만난 패션, 그리고 옷의 역할
대학 진학 역시 계획된 선택은 아니었다고 한다. 여러 학과 중 하나로 의상학과에 입학했고, 동시에 영문학을 복수 전공하며 교직 이수까지 병행했다. 패션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적인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작업을 이어가며 그녀는 옷이 가진 묘한 힘을 발견했다. 내성적인 그녀에게 옷은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보호 장치였다. 말로 설명하지 못한 감정과 불안을 가려주고, 사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통로였다. 그녀는 의복과 장식이 인류 역사에서 수행해온 역할을 언급하며, 옷이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 방식 중 하나라고 말한다.
- 성공이라는 이름의 독
20대 후반, 그녀는 ‘자렛(JARRET)’이라는 이름으로 빠른 성공을 경험했다. 자본금 200만 원으로 시작한 브랜드는 국내외에서 주목받았고, 뉴욕과 파리 무대에 서며 엄청난 상업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시기를 “성공이 아니라 자만이라는 독을 마신 시간”으로 기억한다. 앞만 보고 달렸으며, 사람과 구조를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 투자 과정에서 입은 상처, 인간관계의 균열,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 겹치면서 그녀는 바닥까지 내려갔다. 결국 그녀는 브랜드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내려놓았다. ‘이시안’이라는 이름은 새로운 포장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기 위한 깊은 고민의 결과였다.

- 갑옷에서 피부로
과거의 패션이 자신을 숨기기 위한 ‘갑옷’이었다면, 지금의 패션은 다르다. 그녀는 이제 옷을 ‘살아 있는 피부’에 비유한다. 파충류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듯, 현재의 감정과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피부 말이다. 더 이상 가면 뒤에 숨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의 패션 브랜드 시이안(CEEANN)의 철학인 ‘듀얼리즘(Dualism)’으로 이어진다. 강함과 부드러움, 남성성과 여성성, 구조와 감성처럼 상반된 요소들을 충돌시키며 조화를 찾는 방식이다. 그녀는 극단과 극단이 만날 때 오히려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 고전적인 방식으로 시대를 묻다
이시안은 여전히 직접 패턴을 뜨고 여러 차례 가봉을 반복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생산이 미덕이 된 시대에 그녀의 방식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디자이너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옷에 자신의 감각과 사유가 정확히 스며들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생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지향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고독한 천재라기보다 시대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창작자다. 그녀는 반 고흐보다는 피카소에 가깝고 싶다고 말한다. 난해함에 머무르기보다 동시대 사람들과 호흡하며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다.

-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시대, 다시 인간을 묻다
최근 그녀가 가장 깊이 고민하는 화두는 AI와 인류의 미래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그녀는 이 질문을 패션이라는 언어로 풀어내고자 한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과 사랑, 그리고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태도라고 그녀는 말한다. 인터뷰 말미,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괜찮다고, 지금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는 짧은 답변 속에는 오랜 시간 성숙의 아픔을 견디며 여기까지 온 한 인간의 서사가 담겨 있다.
옷을 만든다는 것은 그녀에게 여전히 세상을 견디는 하나의 방식이다. 구조를 세우고 불안을 통과하여 인간에게 다가가는 일. 디자이너 이시안의 두 번째 챕터는 그렇게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수원=박상욱 기자(sangwook@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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