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박성기의 도보기행]<7> 푸른 호수빛 하늘 아래, 한라산을 걷다(하)


"한라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연의 위대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박성기의 도보기행]<7> 푸른 호수빛 하늘 아래, 한라산을 걷다(상)에서 이어집니다

운해, 세상을 등에 이고 흐르는 하늘의 바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왕관릉 전망대에 이르러 아래를 본다. 망망한 대해처럼 펼쳐진 운해가 바다와 제주시를 이고 거대한 지붕처럼 드리워져 있다. 흰 구름의 물결은 바람을 따라 천천히 흐르고, 그 아래 제주의 마을들은 마치 깊은 바닷속 섬처럼 희미하게 떠오른다. 내가 산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끝자락에 걸터앉아 있는 듯하다.

발아래는 구름의 바다, 머리 위는 푸른 호수 같은 하늘, 그 사이를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오른다. 운해는 산 아래를 가리는 안개가 아니라, 세상을 등에 이고 흐르는 하늘의 바다다.

하얗게 뼈대만 남은 구상나무의 침묵

왕관릉을 지나 정상으로 향하는 길, 구상나무가 산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그중 적지 않은 나무들이 말라 하얗게 뼈대만 남은 고사목으로 서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 모습이 조각처럼 아름다워 감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실상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하얗게 뼈대만 남은 구상나무. [사진=박성기 작가]

고사한 구상나무들은 단순한 자연의 장식이 아니라, 기후변화와 생태계 변화가 우리에게 보내는 고요하고도 강렬한 경고처럼 다가온다. 한라산에 눈도 더 많이 내리고, 봄철 비도 자주 내려 이 숲이 오래도록 푸르게 살아 있기를 마음으로 바라며 걸음을 옮긴다.

백록담, 자연의 위대한 시간 속으로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한라산 백록담 [사진=박성기 작가]

그 침묵의 숲을 지나 드디어 해발 1,950미터, 한라산 정상에 도달한다.

까마귀 몇 마리가 휘휘 돌면서 한라산에 오른 사람들을 구경한다. 저 까마귀가 사람을 구경한다는 묘한 생각을 해 본다. 10여 년 전 왔을 때는 까마귀 수가 사람보다 많은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몇 마리만 남아 사람을 관찰한다. 사람이 가까이 가도 피하지 않는다.

거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백록담이 그 장엄한 속살을 통째로 드러낸다.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묵직한 뭉클함이 차오른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백록담 비와 필자. [사진=박성기 작가]

백록담을 채운 물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백두산 천지처럼 푸른 물이 가득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험준한 길을 온전히 걸어 한라산에 올라섰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은 이미 차고 넘친다. 내가 한라산을 오른다는 것은 잠시 자연의 위대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임을 깨닫는다. 벅찬 가슴으로 정지용 시인의 '백록담'이 떠올라 조용히 외워 본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백록담을 뒤로하고 하산을 시작한다.[사진=박성기 작가]

진달래밭으로 내려오며 피안의 시간을 돌아보다

정상을 뒤로하고 진달래밭 대피소로 향한다. 내려서는 길에서는 능선 너머로 펼쳐지는 제주 풍경이 마음을 붙든다. 하산길은 나무 데크와 화산석 돌길이 교차하며 이어진다. 아래에 펼쳐진 운해는 진달래밭 대피소에 가까워질수록 숲에 가려져 서서히 사라진다. 등산화 밑창에 밟히는 화산석의 감촉과 나의 숨소리까지 모두 한라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진달래밭 대피소 부근의 진달래. [사진=박성기 작가]

정상으로 오를 때는 언제 도착하나 하는 마음이 앞서지만, 내려오는 길에서는 오히려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백록담이 점점 멀어질수록 지금까지 내가 저 높은 피안의 세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진달래밭대피소. [사진=박성기 작가]

진달래밭 대피소에 이르면서 산세는 한결 부드럽다. 붉은 진달래가 능선을 물들였을 텐데, 철이 지나 진달래는 보이지 않고 이따금 철쭉만 눈에 띈다. 대피소에 앉아 잠시 쉬지만, 마음은 여전히 백록담에 머무른다. 벌써 눈 내린 한라산을 떠올리며, 한라산에서 벗어나려면 여러 날이 걸릴 것이라는 즐거운 생각을 해 본다.

성판악 숲길에서 다시 낮은 자리로

하산길이고 길도 편해 자꾸 발걸음이 빨라진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성판악으로 내려서는 길은 길지만, 급하게 몰아붙이지 않아 비교적 편안하다. 사스래나무와 구상나무 사이로 이어지던 길은 고도를 천천히 낮추며 속밭 대피소에 이른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성판악부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노루. [사진=박성기 작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성판악 가는 길에서는 숲의 기운이 더 짙어진다. 그러다가 숲에서 풀을 뜯는 노루 한 마리를 발견한다.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어도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풀을 뜯고 있다. 참 대범한 녀석이다. 아마도 사람들을 많이 봐서 겁이 없는 모양이다.

서서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성판악에 다 온 모양이다. 저만치 성판악 탐방안내소 입구가 보이자 다시 다리에 힘을 준다. 다 와 가니 오히려 다리가 더 뻐근하다. 그새 한라산의 마취가 풀리는 모양이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하산길에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한라산은 오르는 산이면서 동시에 오래 마음에 머무는 산이다. 숲과 계곡, 운해와 백록담, 그리고 고사목의 침묵까지 모두 한라산이 건넨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온몸으로 듣고, 다시 일상의 낮은 자리로 내려온다.

한라산에서 바라본 운해.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https://www.joynews24.com/view/1970427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주요뉴스



alert

댓글 쓰기 제목 [박성기의 도보기행]<7> 푸른 호수빛 하늘 아래, 한라산을 걷다(하)

댓글-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로딩중

뉴스톡톡 인기 댓글을 확인해보세요.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