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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①


트빌리시, 천오백 년의 힙(Hip)한 시간을 걷다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조지아는 오래전부터 한 번쯤 걸어보고 싶었던 나라였다. 코카서스산맥의 설산과 중세의 마을,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길목에서 천오백 년 넘게 이어져 온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직접 만나고 싶었다.

보름 남짓한 여정 동안 트빌리시(Tbilisi)의 골목에서 시작해 메스티아(Mestia)와 우쉬굴리(Ushguli), 카즈베기(Kazbegi)의 탁 트인 산길과 계곡을 걸었다. 그 길에서 조지아가 품고 있는 오랜 역사와 경이로운 자연,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를 만났다. 이제 길 위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시간을 차례로 풀어보려 한다.

벽화 속 소녀를 지나 아침 시장으로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엘보초(El Bocho)의 '장난감을 든 소녀'. [사진=박성기 작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아침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난다. 아직 거리는 한산하다.

숙소 앞 다비트 아그마셰네벨리 거리 82번지 건물 외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스페인 출신으로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거리예술가 엘 보초(El Bocho)의 '장난감 토끼를 든 소녀'다. 긴 머리의 소녀는 토끼 인형을 품에 안은 채 먼 곳을 바라본다. 화려한 색채와 달리 표정은 담담하고 쓸쓸하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 한복판에서 묵묵히 도시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데자르테르 바자르(Dezerter Bazaar). [사진=박성기 작가]

벽화를 뒤로하고 스타디움 방향으로 600미터쯤 걷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선다. 조용하던 거리의 분위기는 금세 달라진다. 데제르테르 바자르(Dezerter Bazaar)는 이른 아침부터 활기로 가득하다. 손수레가 좁은 통로를 오가고,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물건값을 흥정하는 목소리가 시장 안을 메운다.

탐스럽게 쌓인 체리와 살구, 복숭아와 포도, 싱싱한 채소와 향긋한 허브가 좌판마다 가득하다. 천장에는 조지아의 전통 간식인 추르치헬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좌판을 벌인 상인들은 저마다의 언어와 몸짓으로 손님을 부른다. 데제르테르 바자르는 오전에 가장 활기를 띠는 시장이다. 오전이 지나면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장도 서서히 한산해지며 하루의 큰 역할을 마친다.

포도주와 칼을 든 도시의 수호자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솔롤라키 언덕의 나리칼라 요새(Narikala Fortress) [사진=박성기 작가]

구시가지로 이동해 리케공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솔롤라키 언덕으로 오른다.

발아래로 쿠라강, 조지아 사람들이 므트크바리강이라 부르는 강물이 도시를 휘감아 흐른다. 붉은 기와지붕이 이어진 구시가지도 한눈에 펼쳐진다. 오래된 목조 발코니와 현대식 건물이 한 도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언덕 위에는 고대부터 도시를 지켜온 나리칼라 요새(Narikala Fortress)가 자리한다. 여러 차례 파괴와 복원을 거치며 오늘에 이른 성벽은 트빌리시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방문 당시에는 성벽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요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조지아의 어머니(Kartlis Deda). [사진=박성기 작가]

나리칼라 요새 옆에는 조지아를 상징하는 '조지아의 어머니상(Kartlis Deda)'이 서서 트빌리시 시내를 내려다본다. 한 손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포도주 잔을, 다른 손에는 침략자를 막는 칼을 들고 있다. 벗에게는 포도주를 내밀고 적에게는 칼로 맞선다는 조지아인의 환대와 결기가 한 조각상 안에 담겨 있다.

쿠라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역사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메테히 절벽위의 메테히 성당과 고르가살리 왕. [사진=박성기 작가]

맞은편 메테히 절벽에는 메테히 성당(Metekhi Church)과 트빌리시를 세운 바흐탕 1세 고르가살리(Vakhtang I Gorgasali) 왕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솔롤라키 언덕의 조지아 어머니상과 메테히 절벽의 고르가살리 왕은 쿠라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도시를 지키는 두 수호자처럼 서 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쿠라강은 짙은 황갈색 물을 가득 머금은 채 거세게 흐른다. 절벽 아래에는 성 아보 트빌렐리 예배당(St. Abo of Tbilisi Chapel)이 바위에 기대듯 자리하고 있다. 높은 절벽 위의 성당과 강가의 작은 예배당이 한 화면에 담기며 트빌리시 특유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리케공원으로 내려와 메테히 다리를 건넌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메테히 절벽은 더욱 웅장하다. 절벽 아래를 스치듯 흐르는 쿠라강은 쉼 없이 도시를 가르며 흘러간다.

유황온천에서 무화과 협곡까지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아바나노투바니 유황온천지역. [사진=박성기 작가]

아바노투바니(Abanotubani) 온천 지역으로 들어선다. 붉은 벽돌로 쌓은 둥근 목욕탕 지붕들이 낮게 이어지고, 그 사이로 푸른 타일을 입힌 오르벨리아니 목욕탕이 모습을 드러낸다. 페르시아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물로, 실크로드의 거점이었던 트빌리시의 역사적 배경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Alexander Pushkin)은 이곳을 찾은 뒤 "나는 지금까지 트빌리시의 온천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찬사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아바노투바니 유황온천지대와 무화과 계곡. [사진=박성기 작가]

온천 지역을 지나 '무화과 계곡'이라는 뜻의 레그브타헤비 협곡(Leghvtakhevi Gorge)으로 들어선다. 바위 절벽 사이를 흐르는 차브키시스츠칼리(Tsavkisistskali)의 물줄기가 계곡 끝에서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협곡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시원한 물소리가 코끝에 남은 유황 냄새를 씻어낸다. 절벽 위의 목조 발코니들은 금방이라도 계곡 쪽으로 기울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길 위에서는 흥겨운 조지아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여행자들에게 함께하자고 손짓한다. 기타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몸을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행의 흥을 더한다.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오벨리아니 목욕탕. [사진=박성기 작가]

실크로드의 기억을 품은 골목

온천 지역과 레그브타헤비 협곡을 둘러본 뒤 메이단 광장(Meidan Square)으로 나온다. 광장 한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내려서자 붉은 벽돌 아치가 길게 이어진 메이단 바자르(Meidan Bazaar)가 모습을 드러낸다.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메이단 바자르입구. [사진=박성기 작가]

메이단 바자르는 옛 실크로드 상인들이 드나들던 장터의 분위기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지하 시장이다. 천장을 받치는 벽돌 아치와 은은한 조명은 오래된 지하 와인 저장고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통로 양쪽에는 조지아 와인과 전통 증류주 차차, 향신료와 추르치헬라, 수공예품, 에나멜 장신구와 도자기 등이 진열되어 있다.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시장이지만,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만은 아니다. 중세 교역도시였던 트빌리시의 기억을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역사 공간이다.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메이단 바자르의 물건들. [사진=박성기 작가]

메이단 바자르를 뒤로하고 다시 구시가지 골목을 걷는다. 오래된 석조 건물과 작은 공방, 카페가 이어지고, 집집마다 내민 목조 발코니가 골목 위로 겹쳐진다. 집들은 반듯하지 않다. 기울어진 발코니와 벗겨진 페인트, 낡은 창틀이 오히려 트빌리시만의 표정을 만들어 낸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동양과 서양이 한 골목 안에서 어깨를 맞댄다. 그것이 천오백 년의 시간을 품고도 여전히 ‘힙한’ 도시, 트빌리시의 매력이다.

[박성기의 도보기행]<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 ② 편으로 이어집니다

솔롤루키 언덕에서 바라본 티빌리스 시내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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