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조수진의 패션 잉글리쉬] 3천 년 전 옷장이 열렸다⋯놀란의 '오디세이'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영화사(史)를 한 줄 바꿔 썼다. 장편 전(全)분량을 아이맥스 70mm 필름 카메라만으로 촬영한 최초의 영화. 디지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시대에, 놀란은 다시 필름을 들고 3천 년 전의 신화로 돌아갔다.

'오디세이' 스틸컷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오디세이' 스틸컷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의상감독 엘렌 미로즈닉은 이 영화를 위해 무려 5,300벌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칙은 분명했다. "신화는 번역하는 게 아니라 다시 쓰는 것(We were authoring our own mythology)." 그 선언이 자유를 준 만큼 논쟁도 불렀다. 오디세우스(Odysseus)가 쓴 코린토스식 투구(Corinthian helmet)는 실제로는 500년쯤 뒤에 등장한 물건이고, 호메로스(Homer)가 묘사한 건 멧돼지 엄니를 붙인 가죽 투구였으니까.

다만 고증을 따지기 전에 알아둘 것이 하나 있다. 그리스인은 애초에 옷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 복식의 핵심 동사는 cut(컷, 재단하다)이 아니라 drape(드레이프, 둘러 늘어뜨리다). 천 한 장을 자르지 않고 몸에 감아 핀으로 고정했다. 재단선이 없으니 유행도 없었고, 대신 이름이 남았다.

그 이름들이 지금 우리 옷장에 그대로 살아 있다. chiton(카이튼, 그리스식 기본 의복)은 남녀 공용 기본 의복으로 '아마포(린넨) 옷'을 뜻했다. 여기서 line(선), lining(안감)이 함께 나왔으니, 실을 뽑아 늘어놓은 것이 곧 '선'이었던 셈이다. 속옷을 뜻하는 lingerie(랑제리) 역시 프랑스어를 거치며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 한편 여성복 쪽으로 눈을 돌리면 peplos(페플로스, 접어 늘어뜨린 여성복)가 있다. 윗단을 접어 늘어뜨리는 것이 특징인데, 아테네인들은 4년마다 아테나 여신상에 새 페플로스를 지어 바쳤다. 오늘날 허리 아래로 퍼지는 주름 장식 peplum(페플럼)이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그리고 그 옷의 허리를 잡아주던 띠가 zone(조네, 띠)이다. 영어 zone(존, 구역)이 이 허리띠에서 왔다.

'오디세이' 스틸컷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오디세이' 스틸컷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시대가 로마로 넘어가면 옷의 이름도 함께 바뀐다. toga(토가, 로마 시민의 겉옷)는 '덮다(tegere, 테게레)'에서 왔다. protect(보호하다), detect(감지하다)와 한 뿌리이니, 덮으면 protect, 벗기면 detect인 셈이다. 덮는 방식만이 아니라 색과 상태도 의미를 가졌다. 관직에 나서는 남자는 흰 흙으로 표백한 toga candida(눈부시게 흰 토가)를 입었고, 여기서 candidate(후보자)가 태어났다. 선거철마다 후보들이 흰 옷을 입는 건 2천 년 묵은 습관이다. 기혼 여성의 stola(스톨라) 역시 영어 stole(스톨)이 되어 지금도 어깨 위에 걸쳐 있다.

'오디세이' 스틸컷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사진=유니버셜 픽쳐스]

흰색이 자격을 뜻했다면, 자주색은 아예 계급 그 자체였다. 페니키아의 Tyrian purple(티리언 퍼플, 제왕 자주색)은 뿔소라 1만 마리를 삶아야 겨우 1g이 나왔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기에 황제만 입을 수 있었고, 그래서 영어에 born to the purple(왕가에서 태어난)이라는 표현이 남았다.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가 연기한 페넬로페(Penelope)의 깊은 청록빛 의상이 유난히 값져 보였다면,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 서사시가 남긴 것은 옷 이름만이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전쟁터로 떠나며 어린 아들을 맡긴 친구의 이름이 Mentor(멘토르)였다. 아테나 여신은 그 모습으로 변신해 텔레마코스(Telemachus)를 이끈다. 우리가 매일 쓰는 '멘토'는 여신이 빌려 쓴 사람 이름인 것이다. 긴 여정을 뜻하는 odyssey, 치명적 유혹인 siren song, 진퇴양난을 뜻하는 between Scylla and Charybdis도 모두 이 한 편에서 나왔다.

그중 가장 깊은 단어는 맨 마지막에 있다. 그리스어 nostos(귀향)와 algos(고통)가 합쳐져 영어 nostalgia(향수)가 됐다. 원래 그 단어는 감상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지 못해 앓는 병'에 가까웠다.

결국 옷도 이야기도 같은 원리로 살아남았다. 그리스 옷에는 지퍼도, 단추도, 재단선도 없었다. 자르지 않았기에 누구의 몸에나 맞았고, 맞았기에 3천 년을 살아남았다. 놀란 감독이 굳이 필름을 고집한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행은 재단되고 폐기되지만, 원형(原型)은 드레이프처럼 흐르며 매번 새로운 몸을 찾아낸다.

'오디세이' 스틸컷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조수진영어연구소' 조수진 소장 [사진=조수진영어연구소]

◇ 조수진 소장은 베스트셀러 '패션 X English'의 저자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영어교육 전문가 중 한 명이다. 특히 패션과 영어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로 영어 교육계에 적지 않은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UPENN) 교육학 석사와 스톡홀름 경제대학교(SSE) MBA 출신으로 (주)일미푸드의 대표이사와 '조수진영어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주요뉴스



alert

댓글 쓰기 제목 [조수진의 패션 잉글리쉬] 3천 년 전 옷장이 열렸다⋯놀란의 '오디세이'

댓글-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로딩중

뉴스톡톡 인기 댓글을 확인해보세요.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