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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⑨


쿠타이시 바그라티 대성당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⑧ 편에서 이어집니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강을 등지고 언덕으로

이른 아침, 낯선 도시 쿠타이시에서 눈을 뜬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빛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아직 도시가 깨어나기 전이라 거리는 고요하고 공기는 서늘하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숙소에서 바라본 리오니강. [사진=박성기 작가]

리오니강(Rioni River)은 흙빛 물살을 뒤집으며 요란한 소리로 흐른다. 강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짙게 밴 목조 주택들이 물가에 바짝 기대어 서 있다. 그 사이로 줄지어 선 초록의 나무들이 오래된 도시의 풍경을 만든다.

아침 안개가 낮게 내려앉아 건물 사이를 천천히 떠돈다. 안개 속에서 멀리 성당의 둥근 돔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희미해진다. 그 뒤로 산등성이까지 구름이 내려앉아 수묵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안개낀 쿠타이시. 수묵화를 닮았다 [사진=박성기 작가]

강변 숙소에서 우키메리오니 언덕(Ukimerioni Hill)의 바그라티 대성당(Bagrati Cathedral)까지는 1.5km 남짓이다. 여섯 시 반, 강을 뒤로하고 천천히 언덕길을 오른다.

리오니강과 낮은 지붕의 집들, 오래된 건물과 새 건물이 뒤섞인 시가지의 풍경이 펼쳐진다. 거리에는 아직 사람도 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고요한 도시와 쉼 없이 굽이치는 강물뿐이다.

밤사이 비가 내려 길이 젖어 있다. 낮은 언덕을 오르다 돌담 앞에 멈춘다. 돌담 사이로 좁은 계단이 뻗고, 철문 위로 붉은 능소화가 쏟아진다. 담장 너머에는 포도 시렁이 걸려 있다. 아직 푸른 알이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오르며 만난 와인 셀러 [사진=박성기 작가]

길가 와인 셀러가 여행자의 눈길을 잡는다. 유리에 붙은 사진 속에서 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시간에 열려 있을 리 없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춘다.

조금 더 오르니 아름드리나무가 큰 지붕처럼 넓게 펴졌다. 굵은 줄기에서 뻗은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넓은 그늘을 만들고, 나무 아래에는 둘러앉아 쉬어갈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 마을 어귀의 보호수가 떠오른다. 나라와 모습은 달라도 큰 나무 아래 사람이 모이고 쉬어가는 풍경은 닮아 있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바그라티 대성당 가는길에 만난 아름드리 큰나무 [사진=박성기 작가]

큰 나무를 지나니 길가 담장 너머로 자두나무가 보인다. 자줏빛 열매가 잎 사이에 하나씩 매달려 있다.

제자리를 잃은 돌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바그라티대성당에 들어서다 [사진=박성기 작가]

조금 더 오르니 마침내 바그라티 대성당이 눈앞에 드러난다. 큼직한 십자가가 새겨진 검은 철문을 밀고 경내로 들어선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의 모습은 거의 없고, 넓은 마당에는 아침의 고요가 내려앉아 있다.

바그라티 대성당은 조지아를 통일한 바그라트 3세(Bagrat III) 시대에 세워졌다. 1003년 무렵 완성된 이 성당은 통일 조지아 왕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1692년 오스만군의 폭파로 돔과 천장이 무너졌고, 오랫동안 폐허로 남았다. 1950년대부터 이어진 보존과 복원은 2012년에 마무리되었지만, 유리와 금속 등 현대 자재를 쓴 방식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1994년 인근 겔라티 수도원과 함께 세계유산에 올랐던 이곳은 2017년 유산 구역이 조정되면서 목록에서 빠졌다. 수도원은 남았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쿠타이시 시내방향에서 바라본 대성당과 종탑. [사진=박성기 작가]

가까이에서 바라본 대성당은 화려하다기보다 크고 묵직하다. 세월의 흔적이 밴 회백색 돌벽 위로 청록빛 지붕과 돔이 솟아 있고, 가장 높은 곳에는 십자가가 흐린 아침 하늘을 향하고 있다. 오래된 돌과 복원된 부분이 한 건물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보여준다.

천천히 성당 둘레를 걷는다. 주변에는 무너진 옛 성벽의 흔적이 이어지고, 담쟁이와 풀이 돌 틈을 파고들어 자란다. 한쪽에는 크고 작은 돌기둥과 다듬어진 석재들이 세워져 있거나 바닥에 놓여 있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바그라티 대성당의 옛 우물. [사진=박성기 작가]

한때 성당이나 주변 건축물의 벽과 기둥 어딘가를 이루었을 돌들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제자리를 잃고, 복원 과정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 채 남은 듯하다.

돌 하나에 손을 얹는다. 밤새 식은 돌이 차다. 발밑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그 사이로 다듬어진 석재들이 놓여 있다. 누군가 이 마당을 돌보고 있다.

성당 옆에 종탑이 따로 서 있다. 조지아의 종탑은 성당에 붙지 않고 이렇게 떨어져 선다. 지금은 종이 울리지 않는다. 열 시가 되어야 사람이 오고, 그때에야 소리가 날 것이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대성당을 감싸고 있던 성체.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있다 [사진=박성기 작가]

십자가 너머의 도시

이런 돌들에 오히려 눈길이 오래 머문다. 모든 것을 새것처럼 맞춰놓기보다 제자리를 잃은 돌과 무너진 성벽을 그대로 남겨둔 모습에서 지나간 시간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쿠타이시를 내려다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마당 남쪽 끝에 다가서니, 철 십자가가 리오니강과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 너머로 도시가 넓게 펼쳐진다. 낮은 지붕과 오래된 집들 사이로 나무들이 이어지고, 멀리 건물들은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래에서는 강이 쉼 없이 흐른다. 성당에는 인기척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마당을 천천히 거닐며 오래된 돌을 바라보고, 십자가 너머 쿠타이시를 내려다본다. 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기도했고, 또 얼마나 많은 전쟁과 세월이 이 언덕을 지나갔을까.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사제가 사는 집. [사진=박성기 작가]

세 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어 내부 관람은 포기한다. 아쉽기는 하지만 아무도 없는 이른 시간에 찬찬히 성당을 둘러볼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좋다.

대성당을 뒤로하고 철문을 나선다. 왔던 길과는 다르게 바로 아래로 길을 따라 내려간다. 오를 때 안개에 잠겨 있던 쿠타이시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지붕과 골목의 윤곽이 선명해지고, 거리에도 사람이 많아지고 차량도 바빠진다.

뒤를 돌아본다. 대성당은 어느새 언덕 위로 멀어진다. 저 돌들은 천 년을 저 자리에 있었고, 나는 한 시간 반을 머물다 간다.

다시 일상의 거리로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내려가는 길의 리오니강 [사진=박성기 작가]

내려갈수록 강물 소리가 요란하고 거칠다. 강을 바라보다 몸이 딸려 갈 것 같아 살짝 뒷걸음질 친다.

차 한 대가 곁을 지난다. 운전석의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나도 손을 들어 답한다. 잠시 후 그가 차에서 내리는데, 손에 와인 한 병이 들려 있다. 걸음이 조금 비틀거린다. 아직 아침 여덟 시인데도 그는 병을 든 채 태연히 강 쪽으로 걸어간다.

성당은 천 년을 서 있고, 이 나라의 포도는 8천 년을 익어왔다. 아침 여덟 시에 와인을 든 남자에게는 그럴 만한 내력이 있는 것일까?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돌아가는 길. [사진=박성기 작가]

조금 더 내려가니 빵집이 이어진다. 이른 아침이라 반죽을 치대고 화덕에 불을 올리는 중이다. 아직 구워진 빵이 없어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라오니강을 따라 숙소로 항한다.

<11> 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⑩ 편으로 이어집니다

쿠타이시를 바라보는 십자가.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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