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14>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 ⑭ 편에서 이어집니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28e27452e5d6eb.jpg)
열한 개의 스반 마을
조지아 스바네티(Svaneti)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메스티아(Mestia)에서 우쉬굴리(Ushguli)로 이어지는 3박 4일의 트레킹 코스다. 수백 년 전 스반인이 소를 몰고 짐을 지며 오가던 옛길이다. 중세의 돌탑을 품은 마을과 푸른 초원, 그 끝에는 압도적인 설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6d30ccf43f3c76.jpg)
한때 북쪽 러시아 능선 너머로 소금을 구하러 다니던 옛길은 이제 닫혔지만, 전 세계의 트레커들이 그 길을 대신 채우고 있다.
긴 여정 중 나는 오늘 첫 코스인 물라키(Mulakhi)를 걷는다. 물라키는 물크라(Mulkhra)강 골짜기에 흩어진 마을 열한 개를 묶어 부르는 공동체 이름이다.
비와 함께 시작된 길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cc02fb74ad5820.jpg)
출발을 앞두고 잔뜩 찌푸린 하늘이 천둥소리와 함께 골짜기를 울린다.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처마 밑에서 배낭 덮개를 씌우고 스틱을 단단히 쥔 채 길을 나선다. 투박한 돌담을 지나고, 요란한 개 짖는 소리도 뒤로한다. 임도에 접어들자 한 방울씩 툭툭 땅을 때리던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우연히 발견한 뼈대만 남은 콘크리트 폐건물이 훌륭한 피신처가 된다. 비를 피하러 온 이들이 판초 우의의 빗방울을 털어내는 동안, 발밑 자갈 틈에서는 데이지꽃이 빗소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인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7fad6ff638e400.jpg)
비가 잦아들고 모습을 드러낸 반구리아니(Banguriani, 3,838m) 산이 경이롭다. 눈 덮인 정상과 산허리를 둘러싼 새하얀 구름은 시시각각 모양을 바꾼다. 산 위는 눈이고 산 아래는 초록인데, 그 사이만 하얗게 비어 있다. 저 너머에는 신선이 살 것 같다고 일행에게 속삭인다.
촉촉이 젖은 산길에서 이스라엘에서 온 젊은 학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음을 맞춘다.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주고받는 눈인사와 미소만으로 충분하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6912af9dfc1718.jpg)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순간, 우그비리 언덕
5km 지점을 넘어서며 길이 가팔라진다. 빗물을 머금은 미끄러운 흙길 위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발걸음을 조심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고도를 높일 때마다 배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숨은 턱끝까지 차오른다.
출발한 지 6km, 마침내 해발 1,930m 우그비리(Ughviri) 언덕에 올라선다. 메스티아에서 500m 남짓 끌어올린 셈이다. 작은 노상 카페가 있다. 사람들이 나무 의자에 앉아 경치를 내려다본다. 나도 곁에 서서 계곡을 본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25e042695c934f.jpg)
비가 막 걷힌 뒤라 산과 계곡이 씻은 듯 선명하다.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융단 같은 초원, 듬성듬성 놓인 농가, 그리고 밭에 꽂힌 말뚝처럼 서 있는 회색빛 '스반 타워'들. 그 뒤를 거대한 테트눌디(Tetnuldi, 4,858m)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고단한 오르막을 단숨에 잊게 하는 장관이다.
물크라강을 따라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045a11aebda1bd.jpg)
물크라강은 트비베리(Tviberi) 빙하에서 시작해 마을들을 굽이굽이 적시며 흐른다. 강물이 흘러온 궤적을 거슬러 오른다. 멀리 테트눌디 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길이 편안해 콧노래가 나온다. 들판에 핀 야생화가 걷는 이를 반기고, 이따금 풀이 살갗을 스칠 때면 쓰리다. 이곳 풀들은 하나같이 가시가 달려 있어 조심스럽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ef2290fd2b6a02.jpg)
내리막이 끝나는 자리에 라히리(Lakhiri)가 있다. 돌담 너머로 감자밭이 보인다. 돌탑이 마을을 촘촘하게 감싼다. 탑과 탑 사이로 좁은 골목이 나 있다. 탑 그림자가 돌집 지붕에 걸려 있다. 개들이 짖어댄다. 풀어놓은 돼지 한 떼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난다. 이 지역에서 떠돌이 개는 순하지만 집개는 소와 양을 지키느라 사납다.
개 짖는 쪽을 살짝 비켜 비탈길을 30여 분 내려서 자무시(Zhamushi)에 도착한다. 흩어진 집 몇 채 사이에서 산길은 물크라강을 따라온 길과 합쳐지고 계속 동쪽으로 이어진다. 시멘트 집 앞에 표지판이 기울어 서 있다. 한쪽 팻말은 글자가 벗겨졌다. 남은 팻말이 자베시와 아디시(Adishi)를 가리킨다. 여기서 촐라시(Cholashi)까지 4km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5bfcfa9087c0fe.jpg)
자무시를 지나 촐라시로 가는 도중 빙하수가 흐르는 곳을 만난다. 물은 뿌옇다. 빙하가 갈아 낸 돌가루가 섞인 색이다. 나무 판때기 하나가 흐르는 빙하수 위에 걸쳐 있다. 앞사람이 판자 위에서 팔을 벌리고 균형을 잡으며 건넌다. 나는 그냥 물을 밟고 뛰어 건넌다. 다행히 발이 젖지 않는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da5e31cf2ea7b1.jpg)
길가로 나무 울타리가 계속 이어진다. 소나 말을 키우는 목장인 듯하다. 울타리 안은 풀뿐이다. 소나 말이 풀을 뜯는 광경을 그렸으나, 들은 비어 있다.
호두나무 그늘
촐라시에 닿는다. 미리 예약해 둔 '루소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서자 붉은 스웨터를 입은 주인이 환한 얼굴로 반긴다. 마당의 절반을 덮은 넉넉한 호두나무 그늘 아래, 천막 식탁에 둘러앉아 고기를 넣고 구운 스반 전통 빵 '쿱다리(Kubdari)'와 치즈를 베어 문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5655ac8c08adf9.jpg)
함께 걷는 가이드가 조지아 전통주인 차차(chacha)를 권한다. 포도 찌꺼기로 증류해 무려 60도에 달하는 독주다.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말에 단숨에 털어 넣으니,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불기운이 온몸을 속에서부터 뜨겁게 만든다. 물을 두세 모금 들이켜고서야 불이 멈춘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f894aeb02b1062.jpg)
다리 위에서 남겨 둔, 다음을 위한 여백
촐라시를 지나 물살이 제법 세진 물크라강 다리 위에 선다. 건너편 마즈브디에리(Majvdieri), 츠바비아니(Chvabiani), 찰다시(Tsaldashi) 마을 위로, 외적뿐 아니라 '이웃을 향한 피의 복수'를 위해서도 지어졌다는 스반 타워들이 쓸쓸하게 서 있다. 1987년 겨울 눈사태로 무너진 탑과 그 곁에 바싹 붙은 집들이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c5c5d8698a05e5.jpg)
스바네티에서 내 걸음은 아쉽지만 여기까지다. 저 강을 따라 더 오르면 트레커들의 첫 숙박지인 자베시에 닿겠지만, 오늘 걷지 못한 길은 내년 이맘때를 위한 선물로 남겨두기로 한다. 내일은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조지아 군사도로(Georgian Military Highway)를 타고 카즈베기(Kazbegi)로 향한다. 다리 위에서 탑 너머로 사라지는 길을 한참 동안 눈에 담고는, 메스티아로 발걸음을 돌린다.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1036f2d1f0e35d.jpg)
![멀리 보이는 테트눌디 산. 물라키 트레킹 내내 앞을 서있다. [사진=박성기 작가]](https://image.inews24.com/v1/419ce7604e4a5f.jpg)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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