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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소백산, 바람과 구름을 따라 걷다


죽령에서 천동으로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안개를 지나 구름 위에 서다

죽령탐방안내소에 도착한다. 밤새 비가 지나간 아침이라 공기는 습한데도 살갗에 닿는 기운이 서늘하다. 길은 옅은 안개에 잠겨 있다. 그 안개를 헤치듯 죽령에서부터 천천히 고도를 높인다. 제2연화봉에 다가가면서 한결 평탄해진다. 그러나 발밑은 여전히 시멘트 포장길이어서 걸음마다 소리가 마르게 울린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죽령탐방안내소. [사진=박성기 작가 ]

비를 맞은 꽃들이 물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저마다 몸을 기울여 지나는 사람을 맞고, 나는 그 곁을 스치며 걷는다.

2킬로미터쯤 걸었을까. 안개 너머로 조금씩 푸른빛이 비치더니, 구름 사이로 하늘이 열리고 뜻밖에 햇살까지 내려온다. 오늘 소백산이 이대로만 가주었으면 좋겠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제2연화봉으로 오르는 길 [사진=박성기 작가 ]

제2연화봉 못미처 데크전망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산 아래는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천 미터가 넘는 산 위로 올라오고 나니, 조금 전까지 나를 지나던 구름이 이제는 발아래에 있다.

제2연화봉을 지나며 대피소와 강우레이더관측소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해발 1,350미터, 이제부터 본격적인 능선길이다. 길은 연화봉과 제1연화봉을 향해 뻗어 있다. 길섶에는 개망초가 무리로 흔들리고, 그 사이로 마타리가 노란 머리를 높이 들었다. 짚신나물은 사람 다니는 자리마다 따라와 있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순간적으로 구름이 갠다. 오늘 길이 계속 이러기를 바래본다. [사진=박성기 작가 ]

푸른 하늘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느 틈엔가 구름이 다시 몰려와 산을 덮고, 길은 몇십 미터 앞에서 지워진다.

구름에 가려진 길, 숲이 열어준 길

제1연화봉에 닿으니 천문대 흰 건물이 구름에 반쯤 잠겨 있다. 멀리 비로봉 방향을 본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제1연화봉. [사진=박성기 작가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산도, 능선도 모두 구름 속에 묻혀 있다. 보이지 않아도 길은 저 구름 속으로 이어져 있다. 그 끝에 비로봉이 있다.

죽령에서부터 발밑을 따라오던 시멘트 포장길도 여기서 끝난다. 흙과 돌이 섞인 숲길이 시작된다. 숲은 제 안에 많은 것을 품고 있다. 키 큰 나무 아래로 풀들이 층층이 자리를 잡았고, 그늘진 곳마다 닭의장풀이 파란 눈을 뜬다. 어수리는 흰 우산을 펼쳐 들고 사람 키만큼 자랐다. 나무와 풀이 등산로 가까이 밀려들어 앞을 가릴 정도다. 길 밖으로는 울타리가 길게 쳐져 있다. 식물군락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물방울 머금은 푸른 닭의장풀. [사진=박성기 작가 ]

하늘은 우거진 나무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아침인데도 저녁처럼 어둑하다. 밤에 내린 비가 아직 숲을 떠나지 못했고, 바위를 덮은 이끼에 물기가 얹혔다. 발을 디딜 때마다 미끄러워 걸음이 조심스럽다. 어둑한 곳에서도 유난히 붉은 것이 있어 들여다보면 동자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숲을 나온다. 나무 계단이 구름 사이로 올라간다. 저 위 구름이 가린 곳이 제1연화봉이다. 구름이 걷히면 지척인데, 가려 있으니 무척 높아 보인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동자꽃. [사진=박성기 작가 ]

제1연화봉을 지나면 다시 숲이다. 구름과 겹치니 더 짙고 신비롭다. 홀로 걷는 이 숲길이 끝나면 전혀 다른 세계로 접어들 것 같은 묘한 상상을 한다.

천동삼거리에 도착한다. 여기서 천동으로 곧장 내려갈 수도 있지만 비로봉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정상까지 600미터, 부지런히 비로봉을 향한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제1연화봉을 지나 만나는 숲길. [사진=박성기 작가 ]

바람이 구름을 넘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이 세진다. 구름이 능선을 타고 올라오면 바람은 그것을 밀어 올리고, 구름은 담을 넘는 구렁이처럼 능선을 넘어간다. 부드러운데 빠르다.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본다.

까마귀 한 마리가 구름을 맞으며 앉아 있다. 까악, 까악. 사람은 바람을 피하려 몸을 움츠리는데, 녀석은 깃털 하나 세우지 않는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비로봉 아래의 철쭉나무. [사진=박성기 작가 ]

산을 오르다 철쭉나무 군락을 본다. 구름이 능선을 넘어가다 나무에 걸렸다. 철쭉이 낮게 몸을 엎드린 채 걷는 자를 반긴다. 잎에는 붉은 기운이 조금씩 번지고 있다. 높은 산의 가을은 이렇게 먼저 와 있구나.

그리고 비로봉이다. 정상에도 구름이 가득해 멀리 내다볼 풍경은 없다. 발밑으로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바쁘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사람 주변을 맴도는 것이, 사람들이 흘리고 간 먹을 것을 찾는 모양이다. 저 작은 몸으로 이 높은 산에서 무엇을 먹고 사는지…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소백산 비로봉 정상 표지석 [사진=박성기 작가]

천년의 나무 앞에 서다

비로봉을 내려와 천동삼거리를 지나 하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드리 주목들이 나타난다. 뒤틀린 몸통에 바람과 눈을 견딘 시간이 새겨져 있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아름드리 주목 [사진=박성기 작가 ]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주목 앞에서는 사람의 시간이 짧아진다. 내가 지나간 뒤에도 저 나무는 이 자리에 있을 것이고, 백 년 뒤에도 몇백 년 뒤에도 이 능선에서 같은 바람과 같은 눈을 맞고 있을 것이다. 그 앞에 서 있으면 한평생 붙들고 사는 것들이 문득 작아 보인다.

꽃은 배웅하고 물은 따라오고

곧 분홍빛 꽃들이 무리를 이룬 자리가 나온다. 물봉선이다. 한두 송이가 아니라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유를 알겠다. 등산로 양쪽 돌 사이로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물봉선은 그 축축한 돌에 기대어 피었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물봉선 [사진=박성기 작가 ]

밤새 내린 비를 머금은 꽃들이 유난히 싱싱하다. 아침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죽령에서 나를 맞더니, 이제는 물봉선이 천동탐방안내소로 내려가는 길을 배웅한다.

산길을 3킬로미터쯤 내려오니 길이 한결 순해진다. 천동 쉼터를 지나자 길이 넓어진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천동쉼터. [사진=박성기 작가 ]

고개를 들어보니 낙엽송들이 키를 다투며 하늘을 가리고 있다. 곧게 뻗은 나무 사이로 풀이 난 길이 이어진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길인데, 사람이 떠난 뒤 숲이 조금씩 그 길을 되찾아가는 듯하다.

능선을 내려서면서부터 들리던 물소리는 하산하는 내내 따라온다. 졸졸졸. 멀어졌다가 다시 바로 곁으로 다가오기도 하면서, 쉼터를 지나고 한참을 더 내려가도 물은 좀처럼 곁을 떠나지 않는다.

돌 사이를 지나고 물봉선을 피우던 물이다. 골짜기마다 흘러든 물이 하나둘 더해지고, 발소리가 물소리에 묻힌다. 그렇게 천동계곡을 다 내려와 탐방안내소를 지나며 소백산 능선길을 마무리한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천동탐방안내소. [사진=박성기 작가 ]

소백산에 내려놓은 것들

죽령마루에서 시작된 길은 비로봉까지 내내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리마처럼 갈라놓는다. 오랫동안 경계였고, 그만큼 오래 통로였다.

지금은 걷는 이에게 흔쾌히 길을 내준다. 옛사람들에게는 사는 곳을 가르는 벽이었을 것이다. 비와 바람은 그 경계를 몰랐다. 넘나들며 꽃을 피우고 나무를 키웠다.

소백산을 마무리하며, 그동안 등에 얹혀 있던 것이 배낭만은 아니었다. 짓누르던 몇 가지를 능선에 내려놓았다.

맑은 날의 소백산 비로봉 [사진=박성기 작가 ]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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