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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진의 패션 잉글리쉬] 이재용 회장님의 옷장에는 전략이 걸려 있다


2023년 5월, 실리콘밸리의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이재용 회장은 회색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반면 '티셔츠 CEO(최고경영자)'로 유명한 일론 머스크는 검은 티셔츠 위에 재킷을 걸쳤다. 재벌 총수가 더 편하게, 실리콘밸리 혁신가가 조금 더 격식을 갖춰 입은 장면이었다. 두 사람의 옷장을 서로 바꿔 연 듯한 모습은 "오늘은 당신의 언어로 이야기하겠습니다"라며 옷이 먼저 인사를 건넨 셈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9월 30일(현지시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KH컬렉션 순회전 갈라 디너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삼성]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9월 30일(현지시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KH컬렉션 순회전 갈라 디너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삼성]

노동자의 옷이 회장님의 옷장에 들어오기까지. Hoodie(후디·모자가 달린 상의)는 두건을 뜻하는 hood(후드)에 친근한 어감의 -ie(이)가 붙은 말이다. 추위 속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옷은 훗날 실리콘밸리에서 '형식보다 실력'을 상징하는 옷이 되었다.

청바지에도 국경을 넘은 이력이 있다. Jeans(진즈·청바지)는 이탈리아 항구도시 제노바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Gênes(젠)에서, denim(데님·청바지 등에 쓰이는 질긴 면직물)은 프랑스 님 지방의 직물 이름인 serge de Nîmes(세르주 드 님·님 지방의 능직물)에서 유래했다. 한때 일하기 위해 입던 옷을, 이제는 일을 바꾸는 사람들이 입으며 옷의 출신보다 중요한 것은 그 옷에 어떤 의미를 더하느냐가 더욱 중요해 졌다. 청바지 주머니에 아이디어까지 기본으로 들어 있지는 않기에 후드티를 입는다고 혁신가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캐주얼도 장소에 따라 오역되는 경우가 2025년 2월에 있었다. 군복풍 차림으로 백악관을 찾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옷은 전쟁 중인 조국과의 연대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정장을 입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자신이 전하려던 메시지와 상대가 받아들인 메시지가 달랐던 것이다. 나에게는 소신인 차림이 상대에게는 격식을 무시한 태도로 보일 수 있듯이, 옷도 언어처럼 오역될 수 있는 만남이 있었다.

물론 suit(수트,정장)을 입었다고 항상 존중이 자동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형식을 헤아렸다는 신호는 보낼 수 있지만 옷이 전하는 메시지는 입는 사람의 의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는 옷차림에서 예의를 읽고, 누군가는 취향을 발견하며, 또 누군가는 그 옷을 직접 갖고 싶어 한다.

이재용 회장의 빨간 패딩과 패딩 조끼가 화제가 됐을 때, 옷을 입었는데, 소비자는 지갑을 열면서 제품이 sold out(솔드 아웃·품절된)된 사례가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옷차림에서 구매로 이어진 셈이다. 그 관심을 설명하는 심리 개념 중 하나가 the halo effect(더 헤일로 이펙트·후광 효과)다. 어떤 사람에 대한 좋은 인상이 그가 입은 옷이나 사용하는 물건에까지 번지는 현상이다.

'저 옷이 좋아 보인다'는 생각에 '저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살짝 섞이는 것이다. 리더의 옷장이 뜻밖의 광고판이 되는 순간이였다. 다만 같은 조끼를 주문해도 경영 능력까지 묶음 배송되지는 않는다.

2026년 9월 뉴욕에서 열린 The Korea Society Gala(코리아소사이어티 연례 만찬)에서는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젠슨 황의 Van Fleet Award(밴 플리트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이재용 회장 등이 참석했고, 만찬장에는 턱시도와 나비넥타이 차림이 등장했다. 턱시도는 tuxedo(턱시도·남성용 저녁 예복), 줄여서 tux(턱스)다. 나비넥타이는 bow tie(보 타이)다. 초대장에 적힌 black tie(블랙 타이·격식을 갖춘 저녁 예복 규정)는 단순히 검은 넥타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 턱시도와 검은 나비넥타이 등을 갖추는 저녁 예복 규정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9월 30일(현지시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KH컬렉션 순회전 갈라 디너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삼성]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6년 제36회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곽영래 기자]

같은 사람도 깐부 회동 때는 dress down(드레스 다운·격식을 낮춰 편하게 입다), 축하 만찬에서는 dress up(드레스 업·격식을 갖춰 차려입다)을 한다. 개성이 바뀐 것이 아니라 자리에 맞춰 표현을 바꾼 것이다. 옷장에서 꺼내야 할 것은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Clothes make the man(클로즈 메이크 더 맨·옷이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hoodie(후디·모자가 달린 상의)가 실력을 보증하지 않고, suit(수트·정장)가 품격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Tuxedo(턱시도·남성용 저녁 예복)를 입었다고 누구나 그날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옷의 뜻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입는 사람의 태도다.

가을 분위기가 완연한 요즘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게 된다. "오늘 무엇을 입을까?"가 아니라, "나는 오늘 누구에게, 어떤 첫 문장을 건넬까?" 후드티로 건넬 수도, 정장으로 건넬 수도 있다. 옷은 먼저 말한다. 옷이 건넨 말에 진심을 더하는 것은, 결국 그 옷을 입은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9월 30일(현지시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KH컬렉션 순회전 갈라 디너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삼성]
'조수진영어연구소' 조수진 소장 [사진=조수진영어연구소]

◇ 조수진 소장은 베스트셀러 '패션 X English'의 저자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영어교육 전문가 중 한 명이다. 특히 패션과 영어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로 영어 교육계에 적지 않은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UPENN) 교육학 석사와 스톡홀름 경제대학교(SSE) MBA 출신으로 (주)일미푸드의 대표이사와 '조수진영어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김양수 기자(liang@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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