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패션 잉글리쉬] "너네 지금 과소비야" 핀잔에 줄 선 남대문

[조이뉴스24 김양수 기자] 요즘 남대문시장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명품 매장 점주가 아니라 스카프 여섯 장을 1만 원에 파는 아저씨다. 손님이 스카프를 집어 들면 "너네 지금 과소비야. 사가도 집에 가면 안 써"라며 말리고, 선물용이라고 하면 "누구 줄 생각만 해"라고 놀리는데, 파는 사람이 사지 말라고 하는 이 기묘한 장면이 SNS를 타고 퍼지면서 가게 앞에는 줄이 늘어섰고, 급기야 지난주 그는 "저도 돈 벌고 싶지만 이건 아니다"라며 안전을 이유로 셔터를 내렸다.

그룹 아일릿(ILLIT) 민주가 26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아일릿 미니 5집 '브레이크 이븐(BREAK EVEN)' 미디어 쇼케이스에 참석해 타이틀곡 '체포하겠어'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정소희 기자]

영어로 이런 장사를 soft sell(소프트 셀, 부드럽게 권하는 판매)이라고 하는데, 밀어붙이는 hard sell(하드 셀, 강매식 판매)의 반대말이면서도 아저씨는 여기서 한술 더 떠 손님을 아예 talk out of buying(사지 않도록 설득하는것)해 버린다. 그래서 "He talks you out of buying, and you end up buying more."(그는 사지 말라고 말리는데, 결국 당신은 더 많이 사게 된다.)만큼 이 아저씨를 정확히 설명하는 문장도 없다. 덧붙이자면 '과소비'는 overspending(오버스펜딩)이고 충동적으로 지르는 건 splurge(스플러지, 흥청망청 쓰다)여서, "I splurged on scarves at Namdaemun."(남대문에서 스카프를 잔뜩 질렀어요.)이라고 하면 원어민도 웃는다.

그런데 목에 두르는 이 천은 이름부터 사연이 깊다. scarf(스카프)는 옛 프랑스어 escarpe(에스카르프, 어깨띠)에서 왔는데, 원래 순례자가 어깨에 메던 띠를 뜻하다가 16세기 영어에 들어올 때는 군인이 몸에 두르는 띠가 되었으니, 태생부터 사치품이 아니라 실용품이었던 셈이다.

가수 지드래곤이 공항에서 샤넬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사진=샤넬 ]

더 재미있는 것은 넥타이의 조상인 cravat(크라바트, 목에 매는 장식 천)이 태어난 장면이다. 1600년대 중반, 30년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파리의 어느 궁정 앞 광장에 크로아티아 용병 부대가 열병을 위해 늘어섰다. 먼지 묻은 군복에 지친 얼굴이었지만 병사들의 목에는 하나같이 빨간 천이 매듭지어져 있었고, 그것은 전장으로 떠나는 아빠와 아들과 오빠의 목에 어머니와 아내와 누이가 떨리는 손으로 매어준 것이었다. 붉은 색이어야 멀리서도 내 사람을 알아볼 수 있고, 매듭이 풀리지 않아야 살아서 돌아온다고 믿었던, 글자 대신 천으로 쓴 가족의 기도였다.

그 광경을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던 소년 왕 루이 14세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와 맨 앞줄 병사 앞에 멈춰 서더니, 목에 두른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병사는 어린 왕이 자신의 정체를 묻는 줄 알고 가슴을 펴며 "Hrvat!"(흐르바트 — 크로아티아 사람이오!)이라고 외쳤고, 왕은 그 말을 천의 이름으로 알아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궁정에서는 그 빨간 매듭을 'Hrvat'의 프랑스식 발음인 cravate(크라바트)라 부르기 시작했으니, 가족의 기도가 담긴 천이 왕 앞에서의 동문서답 한마디 덕에 패션 용어로 남은 셈이다. 이 것은 바다를 건너 영국 멋쟁이들의 cravat이 되었다가, 19세기 산업혁명기에 바쁜 사무직 남성들이 빨리 매고 풀 수 있도록 길고 가늘게 바꾸면서 지금의 necktie(넥타이)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크로아티아는 2003년 10월 18일 풀라의 로마 원형경기장을 808미터짜리 빨간 크라바트로 둘러 감은 날인 10월 18일을 Cravat Day(크라바트의 날)로 지정하였다. 영어로 "He wears a cravat."(그는 크라바트를 맨다.)라고 하면 격식 있는 멋쟁이라는 뉘앙스가 따라붙는다.

서울시 집계로 올해 1~8월 남대문시장의 외국인 카드 소비는 작년보다 67.9% 늘어 서울 전통시장 평균 50.1%를 훌쩍 넘었다. 백화점에는 더 좋은 스카프가 얼마든지 있는데 사람들은 왜 굳이 남대문으로 가서 사지 말라는 핀잔을 들으며 줄을 서는 걸까. 영어에 "People don’t buy what you sell, they buy why you sell it."(사람들은 당신이 파는 물건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파는 이유를 산다.) 이라는 말이 있다. 400년 전 크로아티아의 가족들이 빨간 천에 담은 것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었듯, 남대문을 찾는 사람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싼 물건이 아니라, 흥정 속에서도 사람 냄새가 나는 장터, 그리고 팔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진심이다.

'조수진영어연구소' 조수진 소장 [사진=조수진영어연구소]

◇ 조수진 소장은 베스트셀러 '패션 X English'의 저자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영어교육 전문가 중 한 명이다. 특히 패션과 영어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로 영어 교육계에 적지 않은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UPENN) 교육학 석사와 스톡홀름 경제대학교(SSE) MBA 출신으로 (주)일미푸드의 대표이사와 '조수진영어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김양수 기자(liang@joy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