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왕의 남자>에 이어 한국 극장가에 사극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음란서생>이 출시됐다. 제목부터 노골적이었던 <음란서생>은 한석규의 사극연기 도전과 아역배우 출신 김민정의 성인연기로 개봉 전부터 관심이 모아졌고 약 250만 명의 관객을 동원, 흥행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음란(淫亂)의 한자말 풀이 자체가 음탕하고 난잡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음탕과 난잡 또한 한자어이니 딱히 우리말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보다 자세하게 한자어를 해석해보면 음(淫)이라는 단어는 삼수변을 이용, 물에 축축하게 젖어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형성문자다. 란(亂)은 어지럽다는 의미이니 음란하다는 말을 순 우리말로 풀이하면 물에 축축하게 젖어 어지럽고 지저분한 상태를 뜻하게 된다.

결국 음란이라는 의미는 남성과 여성간의 성적인 접촉을 상상하고 만들어진 단어라 할 수 있겠다. 굳이 현학적으로 음란의 뜻을 풀이한 까닭은 영화 <음란서생>의 주인공이 바로 조선시대 후기 당대의 문장가이자 유학자인 윤서(한석규 분)이기 때문이다.
신분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는 조선후기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이자 문장에 있어 따라올 자가 없었던 윤서. 그는 당파싸움이나 권력과는 무관한 인생을 살아간다. 형제가 당쟁에 휘말려 의금부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집안에 들어와도 윤서는 애써 무시한다. 그는 문장에만 능했을 뿐, 위약하기 그지없던 양반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의 반대파의 모략으로 난감한 사건을 맡게 되고 이를 수행하고자 저잣거리 유기전에 우연치 않게 들어가게 된다. 이 때 시종잡배들이나 보는 난잡한 책을 처음 접하게 된 윤서. 언문으로 쓰인 그 책에는 남녀상열지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양반 체면에 애써 무시했던 윤서의 머릿속에는 어느덧 억압되어 있던 상상력이 발휘되기 시작하고 결국 윤서 또한 추월색이라는 필명으로 음란소설을 내놓게 된다.
영화 <음란서생>은 비록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만든 사극은 아니지만 극의 분위기를 통해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질서가 와해되고 새로운 기운이 움트는 조선 시대 후기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서양 중세의 르네상스가 신 중심의 억압된 인간관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을 부활시켰듯이 조선 후기 역시 형이상학적인 유교질서가 도전을 받으며 인간의 본능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영·정조이후 실학파의 등장과 더불어 언문소설 등이 창작되기 시작하면서 조선 후기는 분명 임진왜란 전의 조선 전기와 중기에 비해 새로운 기운이 조선 전체에 감돌기 시작한다. <음란서생>이 여타 사극에 비해 모던한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음란서생의 배경인 조선 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음란서생>은 바로 이런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이름 높은 사대부 문장가 윤서가 음란소설 일인자 추월색으로 변하는 과정이 역사적으로도 있을 법했던 일인 양 관객들을 어렵지 않게 설득시킬 수 있었다.

음란하다고 적나라한 것은 아니다
개봉 전 18세 등급을 받은 후 <음란서생>의 노출수위가 대단한거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했다. 그러나 <음란서생>은 에로영화를 표방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막상 야하다거나 적나라한 배우들의 연기는 없었다.
김대우 감독은 영화의 시초가 되는 시나리오 구성에 있어 시각적인 에로틱함을 중심에 놓은 것은 아니었다고 밝힌다. 인터넷에 떠도는 일명 야설을 보다가 야설 작가들도 팬이 있는 것을 보고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소설가가 필명으로 야한 소설을 쓴다면 어떤 상황일까? 감독은 이런 상상력을 주변사람들에게 전했고 요즘보다 조선시대 양반이 그랬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 끝에 <음란서생>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영화는 결국 남녀배우들의 실제 정사장면처럼 말초신경계를 자극하는 장면보다 체면과 위엄을 중시하는 양반 윤서가 자신의 신분에 반하게 되는 야설작가가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양반인 윤서는 이를 통해 유기전의 상민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들의 호응과 칭찬에서 양반 사대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윤서는 뜻하지 않은 만남을 하게 되고 결국 야설작가가 되는 것보다 더 큰 모험을 하게 된다. 왕의 부인인 정빈(김민정 분)과 만나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윤서는 결국 당대의 사회질서에 가장 반하는 선택을 하게 되고 영화는 서서히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음란서생>의 재미는 이처럼 조선시대에 대한 전복적인 상상이 근간을 이룬다. 양반이라는 유교질서의 수호자들이 스스로 억압했던 인간적인 욕망과 본능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윤리교범에 회의하고 되레 사회에 저항하는 과정은 <음란서생>의 후면에 드러나 있는 핵심적인 주제 중에 하나다. 또한 지금 우리사회의 모습을 염두에 둔 감각적인 대사들은 사극 특유의 진중한 맛을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젊은 관객들의 웃음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영화 전체적인 구성에 충실한 서플먼트
2장의 디스크로 출시된 <음란서생>의 서플먼트에서 아쉬웠던 점부터 지적해야겠다. 바로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출연배우들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한석규, 김민정, 이범수 등의 주요출연진은 오디오 코멘터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만이 참여한 오디오 코멘터리는 잡담 위주의 한국영화 오디오코멘터리와 차별화 되었지만 배우들의 육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은 DVD 애호가들로서는 성에 차지 않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이런 아쉬움을 대신하는 것은 외국 DVD 타이틀처럼 영화를 구성하는 전체요소에 대한 다양한 부가영상들이 마련됐다는 점이다. 홍보영상과 성의 없는 메이킹 필름 위주의 관습적인 한국영화 서플먼트 구성에서 벗어나 배우들의 대본연습부터 포스터 촬영현장까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서플먼트의 구성은 알찬 편이었다.

139분에 이르는 본편 시간에 비해 크게 부족하지 않은 서플먼트에는 김대우 감독의 인터뷰를 비롯해 본편과 교차 편집한 메이킹 필름, 1억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유기전 세트 디자인에 대한 인터뷰, 음악 및 의상 감독에 대한 인터뷰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음란서생>에 CG가 사용되었다는 내용의 부가영상이었다.
윤서와 정빈의 인연을 놓았던 문제의 벌이 바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인공 캐릭터라는 사실은 DVD 서플먼트를 보기 전까지 전혀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음질과 화질 측면에서도 극장에서 보았을 때와 커다란 차이는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화질에서는 극장면에서의 탁한 느낌과 달리 자연채광이 좀더 강조된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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