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황기수 코아로직 사장


 

안녕하세요,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입니다.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즈 고범규 사장의 고단한 창업이야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반도체칩 개발전문업종인 팹리스분야에 뛰어들어 4년간에 걸친 자금과의 치열한 싸움끝에 성공반열에 오른 고 사장의 창업스토리 역시 성공하기 위해 이겨내야할 도전과 역경이 어느정도인지를 간접적으로 느낄수 있는 인터뷰였습니다.

특히 고 사장은 기업공개를 위한 IPO를 마무리, 코스닥 상장직전에 미국 아날로그디바이스에 전격적으로 기업을 매각, M&A를 성사시키는 수완을 발휘,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일부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글로벌기업으로 발돋음할수 있는 좋은 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 사장이 추천한 114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은 모바일 멀티미디어 SoC칩분야에 관한한 국내 1인자인 코아로직 황기수 사장입니다.

"벤처기업가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CEO의 모델입니다. 팹리스 업종에서 해외시장을 무대로 3천억원대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대단한 CEO입니다. 뛰어난 경영능력과 투명한 경영스타일,열정등 성공요소를 두루갖춘 경영자입니다."

코아로직 황기수 사장이 어떤 면에서 벤처창업가의 모범적 CEO로 평가받는지,그의 창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휴대폰용 멀티미디어칩 개발회사인 코아로직은 많은 벤처기업들이 벤치마킹하고 싶은 1순위로 꼽히는 회사다.수많은 회사들이 코아로직의 비즈니스 파워를 닮고 싶어하는 이유는 뭘까?

창업 9년만에 연매출 2천400억원대를 기록하면서 국내 팹리스 반도체시장 1위 기업으로 등극한 폭발적인 '성장성'이 첫번째 이유다. 매출의 80%이상을 해외시장에서 거둬들이는 글로벌 수출경쟁력도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기업들이 주고객일 정도로, 단연 세계 최고수준인 독보적인 '기술력'도 코아로직 신화의 또다른 요소다.

2010년 연매출 1조원을 돌파, 명실상부한 글로벌기업으로의 부상을 선언한 코아로직 황기수 사장. 황 사장은 40대 후반의 나이에 창업한 늦깎이 벤처기업가다.

황 사장은 매우 절제된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모양새를 따지거나, 의식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바를 거침없이 쏟아내면서도 절제된 완숙미를 흠씬 풍긴다.

황 사장은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 보인다. 실제 그는 에너지가 넘친다.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이지만, 아직도 비즈니스에 대한 열정은 뜨겁기 그지없다.

황 사장은 사고의 폭에 있어 매우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친다. 강렬한 눈빛과 반듯한 화술은 나이를 잊은 그의 사업가적 기질을 엿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대기업 임원출신에 창업 9년차의 연륜까지 더해진 탓인지, 경영자로서 매우 안정감을 준다. 연륜이 묻어난다. 조직관리에서부터 시장, 향후 주력 제품군의 변화, 그리고 회사가 10년후 변화해야할 방향까지도 명확하게 제시한다.

직원 1인당 10억원이 넘는 연매출 실적에서 보듯, 빼어난 경영수완을 자랑한다. 코아로직은 휴대폰의 카메라가능은 물론, 캠코더, VOD(Video on Demand) 및 MP3, 3D그래픽, 자바게임 등 MAP로 불리는 모바일 멀티미디어칩 전문개발회사.

주 고객사는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등 글로벌 휴대폰메이커로, 2004년 상장, 올해 2천400억원의 매출을 낙관하고 있는 코스닥 우량주다.

◆ 서른살의 도전, 유학

"공부를 더하고 싶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를 해야만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같아서요." 금성통신연구소 연구원 황기수는 80년 가을, 유학가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그해 겨울, 꿈을 위해 과감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황기수는 삼성반도체 공채 1기 출신. 76년, 삼성반도체 부천공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연구원 황기수가 한 일은 반도체 품질관리. 당시는 외국서 설계한 칩을 들여와 조립하는 어셈블리 공정이 고작이었다.

웨이퍼가공, 에칭 등 화학적 공정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는 품질관리는 반도체개발자를 꿈꾸던 황기수에겐 실망 그 자체였다. 거의 '허드렛일'수준이었기 때문. 젊은 황기수는 '안주'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아무리 연봉이 많아도, 비전없으면 과감히 탈피하는 매우 '도전적인' 젊은이였다. 역설적으로 이런 성격탓에 그는 반도체, 통신 등 가장 앞선 최첨단 기술을 접하는 행운을 안는다.

2년여가 지난 78년, 황기수는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안양소재 금성통신연구소에 입사, 통신시스템 개발자로 변신한다. 그가 개발에 참여한 전전자교환기는 당시 통신분야의 꽃으로 불릴만큼 최첨단 제품. 2년 6개월여간 통신시스템 개발자로 빠르게 성장한다.

그는 반도체에 이어 정보통신, 컴퓨터 등 최첨단 IT분야를 두루 섭렵해나가기 시작한다. 황기수의 잠재력은 이때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학사출신인 황기수는 KAIST석, 박사출신들이 연구소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계를 느낀다.

학사출신으로는 큰일을 하기 힘들다는 현실을 직감한 황기수는 과감히 자비유학을 결심한다. 처자식을 거느린 서른살 가장의 놀라운 결단이었다.

젊은 황기수는 삶의 철학이 명확한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비전이 보이지 않으면 과감히 탈피하는 그의 인생철학은 이때부터 그를 격동의 세월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안양시소재 14평짜리 주공아파트를 처분하고 부모님께 손을 벌려 총 1만4천달러의 유학자금을 마련, 처자식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흥분과 설레임에 들뜬 황기수는 훗날 닥칠 지독한 생활고는 상상도 못한채 '박사 황기수'를 떠올리며 연신 흐믓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9년간의 미국 도전기, 그리고 금의환향

"여보, 다음달이면 돈이 다 떨어져요. 제가 공장에 취업을 했어요" 81년 10월말, 인공심장을 만드는 바이오메디컬공장에 취업, 공장노동자가 된 아내의 설명에 황기수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텍사스주립대에 입학한 황기수.

문제는 금새 생겼다. 들고간 자금은 1년도 채안돼 바닥났다. 생활비 걱정에 속이 타들어갔다. 생활고를 해결한 일등공신은 아내였다. 시간당 6달러를 벌기 시작한 아내의 경제력덕에 세식구는 근근히 생활을 이어갈수 있었다.

6년간의 박사공부, 고달픈 타향살이였다. 86년, 꿈에 그리던 박사과정을 끝내고, 부부는 밤새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황기수는 86년, 운좋게도 아는 사람의 소개로 공부가 끝나자마자 미 제너럴일렉트릭(GE)종합연구소에 입사하는 행운을 얻는다.

하지만 세계적 기업 GE도 황기수에겐 성에 차지않았다. 반도체사업부 규모가 너무 작은 데다, 축소될 상황이었던 것. 3년이 지난 89년 여름, 황기수는 사표를 던진다. 꿈을 펼치기에 GE의 그릇이 너무나 작다고 판단했다. 글로벌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국내 반도체업계는 미국 유학파 스카우트전쟁을 벌이던 상황. 황기수는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스카우트 '0순위' 해외파 박사였다. 그는 박사학위에 삼성, LG, 그리고 GE 근무경력까지 갖춘 터라, 기업체 입장에선 초특급경력자일수 밖에 없었다.

황기수는 89년 8월, 임원급으로 현대전자에 입사한다. 그 때 그의 나이 '39세'. 9년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한국행을 택한 황기수는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또한번의 도전에 나선다.

그는 현대전자 반도체연구소 CAD실장을 시작으로, 국내 반도체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때부터 황기수의 거칠것없는 승승장구가 시작된다.

설계자동화실장을 거쳐, 반도체 공정개발 및 팹운영까지 책임지는 연구소장, 시스템IC사업 담당본부장 등 그의 역할은 갈수록 커졌다. 비메모리사업의 개발에서부터 판매까지 책임져야하는 사업본부장은 말그대로 사업부 CEO와 같은 개념.

황기수는 이때부터 사실상 본격적인 경영자 수업을 받는다. 줄곧 시스템IC사업을 맡아, 비메모리시장에 관한한 남다른 감각을 키워간다. 하지만 소량다품종성격이 강해 늘 투자한만큼 수익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시스템IC특성탓에 비메모리사업은 반도체업계에 있어 늘 골치아픈 존재였다.

97년, 현대전자는 시스템IC사업을 전격 포기한다. 황기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메모리사업부로 흡수통합되면서 그는 본능적으로 때가 됐음을 직감한다. 비전이 없으니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97년 12월초,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IMF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일곱. 사표를 던질때만해도 사업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사업가의 길'로 재촉하고 있었다.

◆ 47살의 창업, 처절한 좌절

98년 12월말, 황기수는 팔짱을 낀채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한켠 창문너머로 붉게 물든 석양빛을 바라보며 벌써 몇십분째 창문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엘리트코스를 밟으며 실패를 몰랐던 황기수. 월급날 직원들 급여를 주지 못한 참담함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불거졌다. 주체할수 없는 회한이 복받쳤다. 미국땅에서 고생했던 9년, 대기업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현대전자를 퇴사한 황기수는 창업에 앞서 잠깐 후배회사의 경영을 맡는다.말이 회사지 외산 CAD장비수입, 오퍼상이었다. 3개월이 지날쯤, 기존 사업을 폐기하고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ASIC개발 디자인사업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후배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 창업은 어쩔수 없는 수순이었다. 하지만 IMF직후라 시장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그의 CEO로써의 비즈니스감각은 이때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소자본으로 할수 있는 사업아이템은 뭐가 있을까?" 황기수는 오랜 검토끝에 CMOS이미지센서를 사업아이템으로 정한다. 앞으로 멀티미디어시대가 올 것이며, 이미지수요는 폭증할 것으로 확신했다.

98년 4월, 강남 삼성동에 40평짜리 사무실을 구했다. 자본금 2억원에 직원은 5명. 하지만 사업은 녹녹치 않았다. 그해 가을, 의기투합했던 핵심 엔지니어 2명이 막무가내로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도중하차한 것.

설상가상으로 그해 11월 인생에서 처음으로 참담한 기분을 맛본다. 통장잔고가 바닥나면서 고작 몇 명에 불과한 직원 월급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 급여를 주지 못하는 CEO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CEO가 참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확신이 있었다. 우여곡절끝에 99년 1월, 정부로부터 2억원의 개발자금을 지원받는다. 밤낮없이 매달린 끝에 PC카메라, 휴대형 디카에 사용할수 있는 듀얼모드 이미지센서를 개발했다. 하지만 팔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더욱 일을 벌린다. 이번엔 세트사업에 뛰어든다. 직접 PC카메라 생산에 착수, 덜커덩 10만대를 만들었다. 결과는 대참패.엄청난 재고와 부실채권.

실패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지문인식센서사업에 뛰어든다. 이 역시 시장이 뜨지않아 실패로 끝난다. 이어진 2차원 바코드시스템사업착수,그리고 중도포기.

4전4패. 잇따른 실패와 극심한 자금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참담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신은 뜻을 굽히지 않는 자의 편이었다. 그는 또다시 오뚝이처럼 부활했다.

신규 사업은 매번 대참패로 끝났지만, 사업아이템들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은 폭발했다. PC카메라와 듀얼칩은 각각 99년말 7억5천만원, 2000년 4월,액면가의 40배수에 20억원이라는 알토란같은 투자유치에 성공한다. 가뭄에 단비였다.

코아로직이 회사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극심한 자금난을 단번에 해소, 역동적으로 개발에 나선다. 황기수의 성공신화는 이때부터 서서히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황기수, 그는 누구인가
51년, 서울 생. 연세대 전자공학과(70학번)졸. 삼성반도체 공채 1기출신. 금성통신연구소 연구원. 미 텍사스주립대 컴퓨터공학 석사/박사. General Electric 종합연구소 선임연구원. 현대전자 시스템 IC 연구소장/사업본부장/상무이사. KSIA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이사. 코스닥상장법인협회 이사. IT-SoC협회 부회장.v한국벤처기업협회 부회장.국내 SoC산업계의 대부격으로 통하는 리더.v반도체업계의 마당발로 뛰어난 친화력의 소유자.v부드러운 카리스마와 강한 추진력이 강점.
취 미골프(그는 스스로 골프광이라 부를만큼 골프를 좋아한다.핸디 10)
존경하는 CEO 특별히 없다.
친한 IT맨진대제 전 정통부장관, 송문섭 팬택앤큐리텔사장,허염 매그너칩사장, 김충겸 퓨처캐드사장
10년후 모습10년후 모습 : 5년후엔 현업을 떠나 글로벌하게 움직이는 기업가가 되고싶다.

◆ 황기수의 질주본능

"그래 바로 휴대폰이야. 사진찍는 것은 같고, 이미지 압축기능만 넣으면 돼" 2000년말, 일본 출장길에 전자상가단지인 아키아하라바를 방문했던 황기수는 교세라 휴대폰을 보는순간, 숨이 멎는듯 했다. 번쩍하며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무릎을 쳤다.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은 황기수는 스물스물 번지는 입가의 미소를 주체할수 없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귀국하자마자 SK텔레콤에 납품하는 교세라 외장형카메라를 집중 분석, 한국형 제품개발에 착수했다.

오늘날 코아로직을 있게한 휴대폰용 멀티미디어칩은 이렇게 탄생한다. 2001년, 황기수는 외장형 카메라를 개발, LG전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결과는 USB포트형태로 개발해달라는 주문이 떨어진다. 경쟁사가 국내 최초로 개발, 납품한 외장형 카메라는 느린 속도가 문제였던 것.

3개 회사가 경합을 벌였다. 삼성전자는 이미 일본 회사에 개발용역을 의뢰한 상태였다. 코아로직은 외장형카메라를 최초로 개발했던 경쟁사를 제치고 외장형 USB 카메라를 가장 먼저 개발, 2001년말, LG전자 납품에 성공한다.

휴대폰UBS 외장형 카메라는 이렇게 코아로직에 의해 국내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것. LG전자에 납품을 시작하면서 코아로직은 본격적인 성장단계에 접어든다.

2000년, 2001년 한달에 1억원 남짓하던 매출은 2002년말 4/4분기에만 24억원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연매출이 무려 410억원으로 껑충 뛰며, 코아로직은 일약 스타기업으로 급부상한다.

코아로직의 주력제품은 초창기 CAP(Camera Application Processor)에서 이제는 MAP(Multimedia Application Processor)가 주력이다. MAP는 기존 CAP기능에 캠코더, VOD(Video on Demand) 및 MP3, 3D그래픽, 자바 게임 등의 기능을 통합한 차세대 모바일 멀티미디어 칩.

LG출신들이 창업한 경쟁사를 제치고 LG전자 납품에 성공한 것은 코아로직의 독보적인 기술력때문. 황 사장은 2002년, LG전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면 납품을 받아주겠다는 삼성전자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아무리 최대 고객인 삼성전자라도 상도의상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기술력을 인정해준 LG전자를 배신할 수는 없었던 것. 결국 삼성전자는 코아로직의 경쟁사를 납품업체로 끌어들였고, 그 회사 역시 삼성전자의 지원아래 급성장하게 된다.

2개 경쟁사끼리 삼성전자, LG전자를 양분하던 휴대폰용 멀티미디어칩시장은 2004년부터 조금씩 판도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2004년,삼성전자가 국내 최초로 MAP를 개발한 코아로직을 납품업체로 선정했기 때문.

경쟁사(LG전자) 납품업체를 협력사로 끌어들이는 것은 삼성전자의 관행상 불가능한 일. 삼성전자가 경쟁사의 납품업체를 끌어들이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은 기술유출 리스크때문. 하지만 코아로직의 독보적인 기술력앞에 삼성전자도 어쩔수 없었던 것.

현재 삼성전자 납품업체중 삼성의 경쟁 휴대폰회사에 납품하면서 삼성전자에도 납품하는 회사는 퀄컴, 코아로직 2개사가 유일할 정도다. 코아로직의 기술력수준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이에 힙입어 코아로직은 2005년 1천64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데 이어, 올해도 2천400억원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말부터는 경쟁사를 제치고 명실상부한 1위기업으로 발돋음한다. 급기야 올 1/4분기에는 매출면에서 경쟁사를 더불스코어로 누르고 독주체제를 굳혀가고 있다.

코아로직은 내수용은 생산하지 않는다. 최소 1천만대이상 판매가 예상되는 수출용 휴대폰모델만 겨냥한다. 유럽 GSM시장과 미국 CDMA시장은 누비는 삼성전자, LG전자의 최첨단 휴대폰모델에는 어김없이 코아로직의 칩이 장착되고 있는 것이다.

코아로직의 현재 직원은 205명. 매출액의 80%가량이 수출인 코아로직의 1인당 매출액은 100만달러, 연간 10억원규모에 이른다. 거칠것없는 질주에도 불구하고 황 사장은 요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10년 매출 1조원대를 달성, 명실상부한 글로벌기업으로 부상, 확고한 생존기반을 마련한다는 것.

"세계 휴대폰시장은 인도 등 신흥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시아로 넘어올 것입니다. 휴대폰시장은 먼저 개발하고 적기에 투자하고 적기에 회수하는 볼륨게임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결국 순발력과 자금력이 좋은 한국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퀄컴칩을 제외하곤 핵심부품을 대부분 자급자족하는 한국의 휴대폰산업 인프라가 향후 엄청난 경쟁력을 발휘할 것이라는게 그의 진단.

◆ 황기수의 성공론

황기수 성공론의 핵심은 무엇이든 특정한 분야를 집요하게 파고들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한우물론'으로 집약된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기회는 한번 옵니다. 그때까지 참고 견디면서 부단히 노력하는게 핵심인 듯합니다."

황기수 사장은 사업과 성공론에 대해 아주 명쾌한 답안을 제시한다. 사업은 "남보다 잘 예견하고, 능력있고 사람을 쓰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가 제시하는 성공론도 같은 맥락이다.

첫번째 키워드는 자신이 가장 잘할수 있는 것을 해야한다는 경쟁우위론. "자기 스스로 가장 잘하는 경쟁우위를 확보하는게 중요합니다. 누가 빨리 순발력있게 경쟁우위를 확보하느냐도 관건이죠"

두번째는 어떤 것이 돈될 것인가 하는 사업성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냉철한 '변별력'을 꼽는다. "경쟁우위는 전문성이 좌우하지만 사업아이템에 대한 감각은 부단한 교육과 시행착오를 거쳐 키워가야 합니다."

황기수의 세번째 성공론은 '사람'이란다. 그는 뛰어난 사람을 영입할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좋은 사람을 영입하고, 남보다 더 집중하다 보면 기회가 온다는 '진인사대천명'론을 제시한다.

황 사장은 어떤 것이 돈이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사실 돈을 벌수 있는 기술에 집중하는게 중요하지, 돈이 목적이 돼 단기간에 돈을 벌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돈벌기위해 무조건 IPO행을 택하는 풍토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다.

"이제는 돈되는 기술을 미리 개발해놓고 있으면 수많은 기회가 옵니다. M&A도 좋은 툴이 될수 있죠."

황 사장은 성공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준비와 크게 보는 '스케일론'을 제시한다.

"직원들에게 많이 주고, 파이를 키우는게 매우 중요합니다. 파이가 작으면 지분이 50%가 넘은들 소용이 없죠. CEO는 많이 배풀고, 주면서 파이를 키울줄 알아야 합니다. 능력있는 사람은 확실히 보장해줘야 합니다."

조직관리도 빼놓을수 없는 덕목이란다. "핵심은 투명성입니다. 매니저도 잘못된 것은 빨리 시인해야 합니다. 직원을 뽑을때도 입사시 좋은 점과 나쁜점에 대해 명확히 얘기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와서 불행해질 것같으면 절대 오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능력을 보여주면 투명하게 보상을 해주는게 핵심이죠."

황 사장은 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닌, 우유부단한 직원을 가장 싫어한다. 변화와 혁신적인 자세를 가져야한다고 강조한다. 목적의식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에겐 미래가 없단다.

"기업가가 되기위해서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물론 대기업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는 사업아이템에 대해 곤궁해하는 예비창업가에 대해서도 힌트를 준다.

"우리는 중국에 많은 것을 뺏기고 있습니다. 반대로 미,일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도많은 것을 뺏앗아와야 합니다. 즉 아직도 일본의 우수한 전자부품중에는 국산대체가 가능한 제품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황 사장은 코아로직을 2010년 매출 1조원대의 글로벌기업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이를통해 20년, 30년후에도 생존할수 있는 핵심경쟁력을 더욱 키워나간다는 전략이다.

코아로직 황기수 사장은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 반도체산업계의 새로운 다크호스이자, 아태지역의 리더급 CEO로 우뚝 서있었다. 이미 중국 등 동남아를 비롯해 해외 활동무대를 더욱 넓히고 있는 그의 글로벌 행보가 주목된다.

[인터뷰를 마치며]

황기수 사장은 은퇴후 아태지역 반도체팹리스 대표주자로 활동하고 싶다고 합니다. 세계적 반도체 빅가이(거물들)들을 만나고, 또 큰 M&A도 중개하는 역할을 하고싶다고 하네요. 요즘 툭하면 업계 조찬모임이나 CEO골프회동을 주선하고 회동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합니다.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포토뉴스









코아로직,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98년 4월
연락처(02)501-4636 www.corelogic.co.kr
자본금33억원
사업영역CAP,MAP 등 모바일 멀티미디어 칩
경영계획 글로벌 모바일 멀티미디어 SoC 전문기업으로 도약
매출목표2,400억원(2006년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