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선수들에게 고유번호가 주어진 건 1907년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마이너리그 애틀랜틱리그 소속의 ‘레딩 레드로지스’라는 팀이 선수 구분을 위해 처음으로 선수들에게 고유 번호를 지정해준 것이 시초였다는 것이다. 이때 선수들은 불길한 숫자로 알려진 13번은 서로 회피했다는 당시 신문 기사도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91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선수들에게 번호를 지정해준 것이 처음이다. 클리블랜드는 유니폼 상의 왼쪽 소매에 고유번호를 달았으나 곧 사라졌고 1917년에는 오른 쪽 소매에 번호를 달았으나 이 역시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1929년 뉴욕 양키스와 클리블랜드가 처음으로 등 번호를 달아 서서히 메이저리그에 등번호 달기가 퍼져나갔다.
1932년 시즌 중반에는 내셔널리그가 전 구단에 유니폼을 부착할 것을 명령했고, 1937년에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전신)가 홈 경기 유니폼에 등번호를 달면서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이 최소한 홈경기 유니폼에는 등번호를 달게 됐다.
처음 등번호는 타순을 많이 따랐다. 베이브 루스가 3번을 단 것은 그가 뉴욕 양키스 3번 타자였기 때문이고 루 게릭이 4번을 단 것도 그가 4번 타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쌓이고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명멸하며 등번호에는 특정 이미지와 사연이 담기기 시작했다. 각 구단들은 영구결번을 지정하는 등 등번호에 또 다른 숨결을 불어넣었다.
메이저리그 통산 홈런 1위 행크 아론이 등번호를 44번을 달게 된 과정은 당시 등번호에 대한 인식을 잘 말해준다.
대표적인 ‘44’번 행크 아론은 1954년 조 디마지오와 같은 등번호 5번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러나 이듬해 아론은 보다 큰 번호, 두 자릿수 번호를 요구했다.
이에 밀워키 밀워키 브레이브스 구단은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스탠 뮤지얼 등 위대한 타자들은 모두 한 자릿수 번호를 다는데 왜 두 자릿수 번호를 달려 하느냐”고 만류하기도 했으나 결국 아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50년대와 60년대 양키스를 대표한 강타자 미키 맨틀은 처음 데뷔할 때 6번을 달았다. 3번 베이브 루스, 4번 루 게릭, 5번 조 디마지오에 이어 양키스를 대표하는 타자가 되라는 구단의 기대 때문이었다.
맨틀은 이 번호에 대해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마이너리그로 쫓겨 내려간 맨틀은 다시 메이저리그로 올라온 뒤 부담이 덜한 7번을 달았고 슈퍼스타가 됐다.
스타플레이어가 많은 양키스에서는 한 자릿수 번호 가운데 2번과 맨틀이 달았다가 포기한 6번만이 영구결번이 아닌 번호로 남아 있다. 2번은 데릭 지터가 달고 있으니 곧 영구결번이 될 것이 확실하고 6번은 토니 라제리 이후 확실한 임자가 나타나질 않고 있다.
아무튼 이제 야구 선수들에게 등번호는 단순한 번호가 아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선수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겨 있기도 하고 자신을 채찍질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텍사스 레인저스 포수 제럴드 레어드는 원래 6번을 달았다. 전설적인 타격왕 테드 윌리엄스를 추모하며 그의 등번호 9번을 거꾸로 한 번호였다. 그러나 워싱턴 내셔널스에서 외야수 브래드 윌커슨이 이적해 와 6번을 요구하자 하는 수없이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단 등번호가 15번. 이번엔 누구를 따라 단 번호가 아니라 ‘원맨 파이브 툴스(One man Five tools)’라는 자신의 각오를 다진 번호다. 즉 자신이 정확한 타격, 힘, 스피드, 수비, 강한 어깨를 겸비한 선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번호에 담은 것이다.
보스턴 레드삭스 강타자 데이비드 오티스는 34번을 달고 있다. 뜻밖에도 자신을 방출한 미네소타 트윈스의 간판스타 커비 퍼켓을 따라 단 번호다. 오티스는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던 미네소타 시절 퍼켓에게 정신적으로, 기술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을 잊지 못해 자신의 원래 등번호 27번을 버렸다.
등번호가 자신의 자존심이 되는 경우도 있다.
78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며 많은 수모를 당한 잭슨은 등번호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원래 그의 등번호는 9번. 양키스에서도 당연히 9번을 원했으나 양키스 주축 선수였던 그레그 네틀스가 달고 있어 포기해야 했다. 이에 잭슨은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42번을 달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이번엔 잭슨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당시 양키스 감독 빌리 마틴이 그 번호를 냉큼 자신의 친구이자 투수 코치인 아트 파울러에게 넘겨주었다. 하는 수 없이 메이저리그 홈런왕 행크 아론의 44번을 달아야 했고 잭슨은 결국 그 번호를 양키스 영구결번으로 만들었다. 이제 잭슨을 대표하는 등번호는 9번이 아닌 44번이다.
얼마 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바비 아브레유는 자신이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달던 53번을 달기 위해 원래 양키스의 53번 임자인 3루코치 래리 보와에게 2만달러짜리 롤렉스 시계를 사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겨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뉴욕 양키로 이적한 조니 데이먼도 자신의 등번호 18번을 달기 위해 비슷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최근 LA 다저스로 이적한 그레그 매덕스가 자신의 등번호 31번이 아닌 36번을 달아 화제가 되고 있다. 주위 여론은 31번을 달아야 한다고 부추겼지만 그 번호 주인인 브래드 페니가 31번 양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페니는 자신이 원하는 번호의 임자도 자신에게 그 번호를 양보해야만 31번을 양보하겠다며 버텼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등번호가 몇 번인지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플로리다 말린스 시절 등번호가 28번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페니가 어떤 번호를 원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현재 다저스의 28번 외야수 제이슨 워스는 침묵으로 자기 번호를 지키고 있다.
선수를 구분하기 위해 처음 달기 시작한 등번호는 이제 온갖 유형, 무형의 가치가 담긴 선수의 재산이 되고 있다. 등 번호는 팀내 위상을 말해주기도 한다.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16번을 달고 있는 추신수나 98번이라는 어색한 번호를 달고 있는 서재응도 내년에는 자신이 원하는 등번호를 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알링턴=김홍식 기자 diong@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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