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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욱의 바이오 세상]범죄유전자 은행의 구축이 절실하다


최근 ‘CSI 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동호회를 만들 정도로 미국의 범죄수사 드라마인 CSI 시리즈가 인기를 얻으면서 다소 생소하기만 하던 법의학(Forensic Medicine)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도 젊은이들의 관심이 유난히 높은 듯싶다.

범인은 사건현장에 틀림없이 증거를 남긴다라는 신념아래 현장을 면밀하게 조사하여 범인이 남기고 간 증거와 사건의 정황을 수집하는 수사관을 의미하는 CSI(Crime Scene Investigator)는 법의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범인의 심리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특히 살인사건의 현장의 경우 CSI는 사체의 이화학적 변화뿐만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의 이상징후까지도 분자생물학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분석, 죽은 자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를 듣고 억울한 죽임이 되지 않도록 범인 검거에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와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미 중국 원나라시대부터 오늘날의 CSI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원나라의 왕여(王與)라는 사람이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살인사건의 수사방법과 검시지침을 체계적으로 담은 '무원록(無寃錄)'이란 종합 법의학서를 편찬, 이를 바탕으로 수사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당시에도 인간의 목숨을 존중하고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원통함이 없도록 기록한다’라는 뜻의 책이름을 통해서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왕이 제도와 법률을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최치운(崔致雲)에게 주해하도록 하여 세종 22년인 1440년에 ‘신주 무원록(新註 無寃錄)’을 간행하였고 책의 내용을 조금씩 고쳐가면서 300년 이상이나 검시분야 교과서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상편에는 살인사건 조사에 대한 총설, 검시의 도구 및 절차와 방법, 보고서 작성 방식 등이 실려 있고 하편에는 검시의 기준이 되는 사망 내용을 싣고 있는데 익사, 구타, 중독, 병환 등 22가지의 원인 별로 구분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그 각각을 다시 구체적인 원인에 의해 자세히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독사는 생전에 중독된 경우와 사후에 중독된 것처럼 가장된 경우, 벌레의 독에 의한 것 등 10여 개 이상으로 구분하고 있다. 말미에는 사람의 골격에 관한 글 등 참고 사항도 추가되어 있어 현대적인 법의학과 비교하면 원시적이지만 이미 법의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억울한 죽음과 누명을 쓰지 않도록 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움에 놀랍기만 하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법의학은 20세기 유전공학의 최대 쾌거라고 할 수 있는 PCR법의 발명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중합효소연쇄반응을 의미하는 PCR(Polymerase Chain Reaction)이란 방법은 세포 속에 들어 있는 미량의 DNA를 시험관에서 높은 정확도로 증폭하여 DNA의 양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기술인데, 필요한 장비가 단순하고 책상 위에 놓을 수 있을 만큼 작아 간단히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개발자인 멀리스(K. Mullis) 박사는 PCR법을 고안한 공로로 199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DNA의 증폭에 걸리는 시간이 채 2시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PCR법은 현재 생물학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원천기술인데 염색체를 이루는 DNA염기서열을 결정하거나 친자확인 등에 자주 이용되는 DNA 지문분석법(DNA fingerprinting) 등에 이용되고 있다. 그 밖에 오래된 고생물의 화석이나 미이라, 멸종 생물의 희소 DNA를 증폭하기 위해서도 이용된다.

그러나 역시 가장 많이 사용되고 기여도가 높은 분야는 법의학분야가 아닌가 싶다. 범죄현장에서 채취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범인의 혈흔이나 머리카락, 담배꽁초에 묻어 있는 타액, 지문과 함께 남은 피부세포 등에서 미량의 DNA를 추출, 증폭하여 범인을 검거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PCR법이 없었더라면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발견된 순국 선열의 유해 주인을 찾아 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PCR법이 발명되기 전에는 유전자를 DNA 레벨에서 분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염색체를 최소 단위로 분석하는 방법이 시도되곤 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범죄자는 염색체부터가 정상인과 다를 것이라는 뜻밖의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통상 염색체 연구란 인간의 염색체를 조사해서 유전병과 같은 유전 이상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인데 다운 증후군의 연구가 좋은 예라고 하겠다. 1960년대 분자유전학이 발달하면서 범죄자나 정신병 환자 등에 대하여 염색체상의 이상 유무를 점검해 보는 방법이 시도되었다.

사람의 염색체의 경우, 정상인 경우에는 22쌍의 상(常)염색체와 1쌍의 성(性)염색체로 이루어져 총 23쌍, 즉 46개이다. 그 중 남자의 성염색체는 XY, 여자의 성염색체는 XX로 구성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때로는 생식세포의 감수분열시의 이상으로 염색체가 제대로 분리되지 않아 성염색체가 XO(터너 증후군이라고 함, 여자에게만 발생)이거나 XXY(클라인펠터 증후군이라고 함, 남자에게만 발생)인 사람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부 사람들은 유전자가 인간을 구성하는 지도라면 그렇게 유전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행동에 있어서도 비정상적인 경향을 보이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의외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가정하에 1965년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제이콥스(Patricia Jacobs)는 증명을 위하여 즉시 실험에 착수하였다.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정신이상자와 형이 확정된 범죄인들의 염색체를 분석한 결과, 그들 중에 특이하게도 XYY의 성염색체를 가진 자가 많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 제이콥스의 이름을 따 제이콥스 증후군 또는 야콥 증후군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를 토대로 제이콥스는 남성을 구별 짓는 성염색체가 하나 더 있게 되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나타낸다고 결론짓고, 겉으로 정상으로 보이는 XYY 남성들도 앞으로 죄를 지을 확률이 높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잠정 결론은 이후 1969년 캠브리지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에서 너무 적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고 우연하고도 성급한 결론이었다는 평결로 일단락되면서 학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 파장은 너무나 커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XYY 남성들을 폭력적이고 범죄성향이 짙다고 믿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야콥 증후군은 일반 남성에게서 1/1,000의 빈도로 나타나는 비교적 흔한 유전 이상이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라는 것이 알려졌고 대부분의 야콥 증후군의 환자들은 자신에게 이러한 증후군이 있다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최근 강호순에 의하여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으로 인해 이젠 우리나라도 전과자의 유전자를 분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범죄유전자 은행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뜨거운 것 같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경찰은 지난 2006년 국회에 제출했다가 17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어 버린 ‘유전자 은행법안 (가칭)’을 다시 국회로 들고 가기로 했다고 한다. 강력 범죄, 성범죄, 미성년 관련 범죄 등으로 유죄가 확정된 전과자의 혈액 또는 구강세포를 체취, 유전자 정보를 모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자는 것이 이 법안의 주요 골자이다.

경찰은 시스템만 완성되면 사건현장에서 채취한 머리카락과 담배꽁초에 뭍은 타액, 혈흔, 정액 등에서 DNA를 추출, 유전자 정보은행에 이미 등록된 유전자와 비교함으로써 용의자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제 선진국이면서 범죄 선진국이기도 한 미국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1998년 유전자 정보은행을 설립, 현재 유전자 정보은행에는 이미 범죄자 200만 명의 유전자 정보가 확보되어 있다.

영국은 성폭행범을 대상으로 1995년에 세계 최초로 국가 주도의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데 이어 살인강도, 차량절도 등으로 적용 대상을 계속 확대하고 있으며 유전자은행에는 270만 명 이상의 범죄자와 24만 건 이상의 미제사건이 수록돼 있다고 한다. 아무튼 영국은 이를 통해 9만4천여 건의 사건에서 용의자를 가려내 범인 검거율이 23%에서 무려 43%로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아시아에서는 이미 홍콩이 2000년에 정부 산하연구소에 유전자 자료은행을 설립했으며, 싱가포르도 유전자 자료은행을 운영 중에 있다. 최근 재일 외국인의 범죄율 증가에 신경이 날카로운 일본 역시 2005년에 2만여 명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그간 풀지 못한 263건의 미제사건을 해결하였다. 강력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특정 집단의 유전자를 채취해 분석한 뒤 전산으로 입력해 보관하는 유전자 정보은행을 핵심 인프라로 활용하여 좋은 결과를 얻은 셈이다.

하지만 전과자 유전자 은행법안이 안 그래도 한 두 번의 실수로 늘 우울한 전과자를 또 한번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인권침해라는 주장이 우리나라의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날로 교묘해지고 수법이 다양해지는 범죄에 대한 대책으로 과학수사 이외에는 뾰족한 수단이 없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형사사범 가운데 재범비율은 47.5%나 되고 전체 사건 중 강력범죄 비율은 15%로 영국, 미국, 독일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범죄자 인권 보호도 선진국으로 가는데 있어서 중요하지만 흉악범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잡지 못했더라면 연쇄살인범과 같은 하늘아래에서 살아야 한다는 불안감을 해소할 수야 없겠지만 유전자 정보은행과 같은 기초 인프라를 하루 빨리 갖추어 날로 선진화되어 가는 범죄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 줘야 할 나라는 경제선진국이지 범죄선진국이 아니라는 점을 늘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성욱 인큐비아 대표 column_sungook@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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