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인터파크 CEO](1) 어머니로부터 배운 벤처 경영


 

몇 주 전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 불혹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되도록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오면 막막해 하던 터에 한 1년 전부터 자신 있게 나의 ‘어머니’라고 얘기하게 되었다. 몇몇을 잃고서도 아직 5남4녀의 대가족이 있게 한 주인공이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소중하지만 나의 어머니의 인생역정은 지금 벤처를 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장형이 올해 환갑이니 막내인 나는 40세 이전의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한다. 들은 바로는 형들과 누나들이 많이도 배를 곯고 지냈다는 것과, 살림이 어려워지면 시장에 뭔가를 내다 팔고 동네 사람들에게 주사도 놔주고, 품팔이도 많이 했다고 한다. 다만 놀라운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공부 만큼은 철저히 시켰다는 점이다. 학교를 보낸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무슨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가족 모두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 자리잡은 모양은 방 한 칸에 형제들과 아버지까지 일곱이 한 덩어리로 자고, 좀 떨어진 곳에 조그만 편물학원을 열고 그곳에 딸린 방 한 칸에서 자매들과 어머니까지 5명이 기거하는 형태였다. 내 기억으로는 1년에 한 두어 번 이사를 했던 것 같은데, 작은 방에서 큰 방으로 다시 방 2개로 3개로 조금씩 살림을 키워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고르게 퍼져있는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어머니는 새벽 4~5시면 일어나 매일 도시락을 쌌다. 낮에는 편물학원에서 실들과 씨름하고 오후 늦게 시장에 나간다. 많은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질보다는 양이 가득한 장바구니를 한 어깨가 빠지게 들고 이고 산동네까지 올라오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키도 작아서 장바구니가 거의 땅바닥에 끌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드라마라면 으레 있는 불평이 끼어들지 않는다.

어머니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살림규모가 빠듯한 데도 어떻게 해서든 등록금은 어머니 주머니에서 나왔다. 책을 사야 된다고 얘기하면 좀 기다려보라고 하고 나선 며칠 후면 꼭 손에 쥐어주곤 했다. 어릴 적에 어머니의 주머니는 결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다. 내가 나이 든 뒤 어머니가 고백하시는 말씀이, 그 당시에는 돈이 나갈 곳은 너무도 많은데 수입은 빤하니 돈을 돌리고 쪼개 쓰느라고 매일매일을 고민하며 살았다고 했다. 자식이 좋은 점수의 성적표를 들고 오는 것으로 모든 고민을 날려버리곤 했다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처지에 있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가 살만한 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나중에도 자식들이나 며느리들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어머니 자존심은 누군가에게 어렵다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중요했던 철학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궁핍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만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살아 가면서 사업도 하면서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부분이다. 대개의 경우 조금만 어려워도 죽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다반사인 세상에서 말이다. 수입이 지출보다 턱없이 부족한데 궁핍해 보이지 않으려면 가계부와 피를 말리는 싸움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또 다른 어머니의 말씀이 있다.

“한 달에 1원이라도 가계부에 적자가 나면 걷잡을 수 없다. 이상하게도 1원이 10원이 되고 10원이 1,000원이 되고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다”고 했다. 1원이라도 흑자가 나면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긴다고도 했다. 그저 어려운 시절에 느낀 단상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어머니의 성공은 눈부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어머니의 생활철학들을 가슴 깊이 되뇌이곤 한다.

어머니의 인생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우선시되었던 것은 역시 공부였다. 많은 부모네들이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뭐 새삼스러울 것이 있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등록금과 밥 사이에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책값과 병원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어머니는 자식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고 고등학교라도 졸업하고 나서는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오히려 못 배운 자식들이 더 효자노릇을 한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이 모아둔 재산이 하나도 없고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해결할 테니 막내인 나까지도 능력만 된다면 석·박사까지라도 해야 한다는 태도를 한번도 흐트리신 적이 없었다. 최고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때부터인가 나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누이들이 옛날 얘기를 들려줬다.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초에 한번 들러서 진학상담을 하면서 “서울대에 가지 못할 거면 막노동을 시킨다”고 공언을 하셨다 한다. 그런데 그 태도가 어찌나 엄숙했던지 진학상담은 그 말 한마디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한 번도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는 각오로 임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잘 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믿었다.

데이콤으로부터 인터파크의 주식을 전액 인수할 때가 기억난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오히려 잘된 일이 돼버렸지만 그 때는 잘 못하면 나의 모든 것을 날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주변사람들이 지나고 나서 그 때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덤덤했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어머니에 관해 슬프고 기쁘고 막 하고 싶은 얘기들은 많이 있지만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나에게 전해준 중요한 교훈 한가지를 얘기하려 한다.

사실 어머니가 실천하면서 보여준 부분도 있고 또 어머니의 생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이기도 하다. 한 여자로서 어머니의 인생은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다. 어찌 보면 끊임없는 희생과 절제 그리고 신념이 있었기에 지탱할 수 있는 가혹한 삶이었다.

내가 가정을 꾸리면서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은 바로 책임감이다. 내 아내와 자식들에게 어머니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너무나도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겠다는 책임감이다.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나는 늘 뒤로 숨어버리지 않고 책임을 지겠다는 용기를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왜냐하면 회사가 잘못되면 회사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에게 가혹한 환경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는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면 눈부신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고…

어머니는 정확히 벤처를 경영하신 것이다. 고난을 굳센 의지로 극복해 나갔다. 일 년 이 년의 문제가 아니었다. 큰 자식부터 막내까지 무려 40년 이상을 2년에 한 번 꼴로 자식을 낳고 키우고 학교를 보내고 또 낳고 집을 옮기고 늘어가는 지출을 맞추기 위해 또 일을 하고 하면서 온 몸을 던져 성공을 일궈냈다. 아들중 3명을 서울대에 보내고, 딸들도 모두 고등학교는 어머니 손으로 보냈다. 딸들을 대학 못 보낸 것을 늘 미안해 하셨다. 그 자식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제 몫을 톡톡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 식구들이 모이면 정말 대가족이다. 어디 가도 남 부끄러울 것 없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자식들이 즐비한데, 돌아가실 때 보니 아주 작은 몸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왔다. 그 작은 몸을 쳐다보면서 지금 수 많은 자식들과 손자들까지 생각하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성공적으로 키우는 일, 이 것이야 말로 벤처중에서도 제대로 된 벤처의 사명일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어머니는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어머니의 그 신념과 의지를 그대로 받고 싶다.(계속)

/이기형 인터파크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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