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인터파크 CEO] (4) 왜 인터넷 쇼핑몰인가?


 

인터넷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일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 것은 95년 봄 쯤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어느날 갑자기 뇌리를 스치듯이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 아니라 몇 번의 선택이 인도한 길이다.

데이콤에 처음 입사해서 한 일은 국제전화사업을 하기 위해 한국통신으로부터 시외망과 시내망의 설비를 제공받고 그 대가인 접속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되는 각종 제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정통부가 심판을 보고 한국통신과 데이콤, 그리고 지금은 SK텔레콤이 된 당시의 한국이동통신이 한 판 논리싸움을 벌이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통신사업에 경쟁을 도입하는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좀 옆길로 새는 얘기지만 그 때 ‘왜 산업에 경쟁이 도입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를 개발하고 미국 등지의 사례를 밤새 번역하고 정리하면서 나도 모르게 경쟁신봉자가 되어 버렸다.

그 때의 화두였던 ‘equal acess’ (동등접속)이란 용어는 인터파크 사업을 하면서도 가끔 사용하게 되었다. 경쟁이 없거나 배제되어 있으면 조직이든 서비스든 썩게 되는데, 문제는 독점사업자 빼고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는 데 있다. 아직도 독점도 능력이라고 얘기하는 수준의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다.

전략기획부문에서 그 국제전화사업을 준비하는 동안, 미국의 사례와 사업구조, 미래의 전략 등에 관한 정보를 많이 취득하게 됐다.

설레는 마음으로 미국에 처녀 출장을 가게 되면서부터 인생에서 해야 할 과제가 추가되었다. 바로 영어였다. 말이 잘 안되면 출장이 관광이 되고 만다. 미국친구를 어렵사리 사귀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정도 업무 이야기는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부서도 해외사업쪽으로 옮겨, 여러 나라를 다녀볼 귀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선진국 중에서도 특히 미국과 미국 사람들을 조금씩 알게 되자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너무도 저자세로 대해 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별반 똑똑하지도 못한 친구들을, 영어를 하고 미국기업에 일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너무도 분에 넘치는 대접을 해주고 있었고, 실제로 협상에서 지레 주눅이 들어 양보해 버리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미국기업과 제휴라도 하면 한 건 한 것으로 보는 일종의 사대주의 분위기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은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한 회의석상에서 미국기업의 주장을 듣다 보니 열불이 나서, 그 자리에서 뛰어나가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논리적으로 따져 한 100만불쯤 깎은 적도 있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내용을 잘 파악하여 득실을 계산할 수 있는 머리가 더 중요한 법이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오면 갑자기 똑똑해 지는 것이 아니며, 미국이 하는 일이 다 잘하는 일이고 옳은 일은 아닐진데, 현실에서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참 슬픈 현실이다.

두 번째로 느낀 점은 한국이 세계에서 너무도 미약한 나라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뭐 거창한 애국자랄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이 잘 되지 않고서는 세계가 한국에 사는 우리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 내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무리가 가더라도 미국사업을 고집한 것이나 항상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알고 보면 언젠가는 세계시장에서 인정을 받는 사업을 일구어 지금은 무너져있는 한국의 자존심을 세우고 구체적으로 겨룰 힘을 갖자는 내 머리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경험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금도 한국이라는 브랜드는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미미한 존재일 따름이다. 그냥 동등해지자는 생각이니,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실천만이 남아있다.

93년경으로 기억되는데, 데이콤에서 멀티미디어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멀티미디어는 자고로 미래적이고 꿈의 통신으로 불리는 사업이다. 그간의 경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무리(?)를 해서 그 부서로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돼서 광대역 멀티미디어서비스와 협대역 멀티미디어 서비스의 전쟁이 붙었다.

광통신망을 깔아서 특정지역부터라도 홈쇼핑, 홈뱅킹, VOD를 처음부터 폼나게 제공해야 한다는 측과, 느려터져 VOD는 엄두도 못내지만 당장 더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전화망 등을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했던 것이다.

지금은 보라넷으로 알려진 서비스도 한 축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기술자에게 물어물어 인터넷에 접속한 첫 소감은 환상이었다. 느리지만 스멀스멀 그림이고 글씨고 기어나오는 게 한마디로 예술이었다. 천리안같이 큰 조직에서 여러 장비를 투자하여 기껏 Text로 정보를 제공하는 게 내가 본 전부였었는데 개인들도 조금만 돈을 들여 홈페이지를 만들어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고 미국처럼 멀리 떨어진 곳의 정보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94년 봄에 참가한 미국의 인터넷 전시회는 내가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광대역 멀티미디어 서비스는 아무리 좋은 품질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투자비가 초기에 너무 많이 들고, 극히 소수만이 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반대로 협대역 멀티미디어서비스, 다시 말하면 인터넷은 품질이 많이 떨어지지만 별반 투자 없이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손쉬운 이용환경으로 사용자 수가 눈덩이처럼 늘고 있었다.

나는 표준논쟁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은 표준이다.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역사에 있어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프로토콜로 합의를 본 위대한 사건이었다.

그 다음부터 나는 인터넷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부서도 자연스럽게 인터넷사업팀이 신설되어 그리 옮겼다. 보라넷을 중심으로 기술이 중심이 되는 회선사업을 하고 있으니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업거리는 한 두 가지가 됐다.

홈페이지를 구축해 주는 사업과 홈쇼핑이 그 것이었다. 홈페이지 구축부터 시작되는 기술사업의 편력은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얘기하도록 하고 인터넷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파는 일(그 때는 적당한 이름이 마땅치 않았다)은 내 나름대로는 이런 과정을 거쳐 나의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홈쇼핑사업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홈쇼핑의 대세는 카드사 등에서 발송하는 DM(Direct Mail)이었다. 케이블TV 홈쇼핑은 이제 막 성장하는 중이었고. DM 홈쇼핑은 당시에도 업체별로 수백억원의 매출을 알토란같이 올리고 있었고, 카드사는 많은 책임과 비용을 상품공급업체에 지우고 있었기 때문에 안정된 수입원도 되고 있었다.

그런데 카드사의 청구고지서와 함께 들어가는 상품카탈로그는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수 십 종의 상품만을 팔아야 하는 제약이 있었다. 매체비와 배송비, 비대면구매, 가격경쟁 등 홈쇼핑 고유의 제약조건들로 인해 상품속성도 충분한 마진이 보장되고 혹해서(?) 사보는 것들에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TV홈쇼핑으로 가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TV에 소개될 수 있는 상품도 한정적이고 TV매체비는 엄청나게 들기 때문이다.

같은 홈쇼핑사업이라고 해도 매체가 달라지고 다루는 상품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사업이 된다. 지금도 잘 나가는 TV홈쇼핑과 인터넷쇼핑이 대적할 수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는 전혀 다른 사업이라 비교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모델에 대해서도 같은 유통으로 바라보고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바라보는,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전혀 현실과 다른 견해가 많다. 인터파크가 많은 정력을 들여 경험한 뼈아픈 실패의 경험은 ‘오프라인은 온라인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내가 할 일을 사이버쇼핑몰 사업이라고 명명했고, 당시 코너를 빌려주고 월정액을 받는 방식(임대방식)이긴 했지만 천리안에서 이루어지는 홈쇼핑을 기본 데이터를 삼고 DM과 TV홈쇼핑 그리고 카탈로그 책자를 매체로한 홈쇼핑들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고무적이었던 점은 이들 시장이 매년 50% 이상씩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사업을 시작하느냐의 문제였다. 작지만 내 손으로 옹골지게 시작하는 방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해도 창투사를 통한 자금조달은 꿈만 같은 얘기였다. 내가 무식했을 수도 있으나, 그 때 내 머리 속에 사업이란 돈을 벌어서 재투자하고 또 벌고 이런 선순환을 만드는 것 외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적이 없었다.

혼자서 하자니 초기 투자와 운영비를 감당할 형편이 못되었다. 친구들과 동업으로 멀티미디어 제작 사업을 잠시 옵저버 자격으로 해본 경험에 비춰 동업은 너무도 위험한 것이었다. 목숨을 나누어서 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고민을 담당임원과 나누다, 사내 소사장제(당시 데이콤에서는 사내 벤처를 육성하기 위한 소사장제를 운영중이었다)에 도전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나중에도 성공사례로 많은 기업들이 벤치마킹을 하고 사내방송에도 인터뷰가 되곤 했던 그 소사장제는 초기에는 습작같은 것이었다.

요지는 회사에서 사업계획서를 승인하고 예산을 편성해서 주면 소사장은 열심히 사업을 추진하여 계획대비 수익이 초과달성하면 인센티브를 받는 형식이었다. 지금 인터파크는 사업부서별로 통째로 이 제도보다 더욱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조만간 수익이 나면 상당한 보상이 될 터인데 지금 직원들이 느끼고 있는 강도는 그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강도와는 심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다소 맹목적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무조건 그 사업을 하고 싶었다. 인센티브는 부족해도 좋았다. 나중에 제대로 사업을 수행하게 되면 그 사업은 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시작했고 내가 제일 잘 하는데 그 사업은 내가 주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찌보면 인센티브제도의 하나인 소사장 승인을 받는 과정도 ‘남의 손에 갈지도 모르는 큰 떡’으로 비춰졌는지, 아니면 내가 절대절명으로 꼭 해야 겠다고 집요하게 소망을 해서 그런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수 십 번은 사업계획서를 고치고 설득하는 작업 끝에 드디어 95년말 사업계획 승인이 나왔다. 그런데 둘러보니 사업을 시작할 사람은 나 혼자였다. 급한 김에 친구와 아는 후배들을 연결연결하여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넘어지면 쓰러져 버리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더욱이 99년이 될 때까지는 외줄타기였다.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서 제법 모습을 이룬 사람을 보면 뭔가 운명적이고 거창한 스토리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인터파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운명의 길을 가는 혜안을 가진 선각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터넷 상거래라는 길이 시기적으로 열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연히도 그 길을 갈망했고 그 길을 가서 20대의 방황을 보상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해 있었던 것이다.

나 말고도 그 때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차이는 ‘내가 그 때 먼저 그 길을 갔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아직도 그 길을 가고 있다’라는 점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대부분의 위대한 생각도 고민하다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길에 들어서고 나서도 자꾸 되돌아 보다가 이탈해 버리고 만다는 점이 두 번째 얘기다. 내 전략은 이렇다. 비슷한 길이 여러 개 나타나면 빨리 한 길을 택한다. 택하고 나면 그 길을 나의 운명의 길로 만든다. 대강 이런 얘기다.

사업으로는 선배격인 많은 분들이 ‘사업은 사람이다’라고 얘기한다. 96년 1월부터 판을 짜기 시작한 인터파크 사업도 역시 사람을 모으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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