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정적인 순간 운이 따르지 않고 일이 꼬여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삶이 떠밀려 왔다. 한두 번도 아니고, 중요한 길목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복병과 맞서며 '포기'할까 거듭 망설였다. 하지만 그 때마다 희미한 한 줄기 빛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롯데 신고선수 이도윤(24, 외야수)은 지난해 10월 자신의 이름 '웅용'을 버렸다. 지금껏 살아온 삶 속에 녹아 있던 불운과 아픔을 이름에 담아 내던지고 싶었다. 그만큼 절실했다.
"원래 제 이름 정말 좋아했어요. 물론 발음이 어렵긴 했지만.(웃음) 개명을 결정한 건 제 자신입니다.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하셨어요. 굳이 그럴 것까지 있냐면서... 하지만 전 과거의 모든 걸 털어버리고 싶었어요."
■ 잘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시작한 야구
서울고와 단국대를 졸업한 이도윤은 경찰청 야구단에서 2년의 세월을 보낸 뒤 롯데 신고선수로 프로에 발을 디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남보다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한 그는 그저 '야구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잘 하는 편도, 그렇다고 체격이 월등한 편도 아니었다. 신월중학교에서도 그는 주로 볼보이로 활약했다. 가끔 빈 포지션을 메우는 이른바 '땜빵용' 선수였다.
"그래도 중학교 때 4교시 수업만 받으면서도 평균 80점을 넘기는 등 공부도 꽤 잘했어요. 부모님이 운동을 그만두라고 하셨죠. 실력도 부족했지만 사실 키도 160cm를 겨우 넘었을 정도로 작았어요. 여러모로 운동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많았죠. 부모님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도윤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야구를 하기 위해 서울고에 진학했다. 물론 거기서도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다만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신념만을 간직한 채 운동에 전념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고교진학 후 키도 부쩍 자랐고 기량도 늘고 힘도 붙기 시작했다.

■ 불운의 세월...때마다 이어진 악재
고3이 되던 2003년 3월초 서울시 춘계리그 겸 대통령배 예선에서 13타수 8안타, 청룡기 예선에서도 6타수 4안타를 기록하는 등 초반 출발이 좋았다. 시즌 첫 대회라 많은 스카우트가 지켜보며 졸업예정 선수들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나가던 이도윤은 선린인터넷고와의 경기에서 도루를 하다 2루수 스파이크 징에 무릎을 찢기는 부상을 당한 뒤 슬럼프가 찾아왔다. 타격 밸런스가 무너졌고 정작 중요한 전국대회에서는 별 성적을 내지 못하고 부진했다.
서울고가 그 해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한 탓에 단 한명의 졸업생도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했다. 이도윤도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대학진학을 선택했다.
세월이 흘러 대학 4학년. 두 번째 (프로진출) 기회를 앞두고 있던 차에 불운은 시즌 초반에 또 슬며시 찾아왔다.
"춘계리그 시작 전에 엄지손가락을 다쳐 방망이를 쥘 수 없었어요. 그래도 게임은 뛰어야겠다고 나섰지만 엉망이었죠. 시즌 전반엔 출전을 못했어요. 속이 타들어갔죠. 후반기에 성적을 좀 냈는데 그건 드래프트가 끝난 직후였던 추계리그 대회였어요. 한 마디로 지독하게 안풀리는 경우죠."
몇 개 프로구단의 관심을 받아 내심 기대가 컸지만 정작 그를 선택한 곳은 없었다.
"야구를 그만두겠다며 유니폼을 입은 채 짐 챙겨서 숙소를 나왔죠. 며칠간 집에 있으면서 생각해 보니 졸업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학교로 돌아갔는데, 여기저기에서 신고 선수 테스트를 보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참가하려고 했었는데..."
이번엔 복막염이라는 복병이 그를 가로막았다. 보름 이상 입원을 해야 했고 그 시기는 얄궂게도 구단들이 정해놓은 테스트 날짜와 맞물렸다. 이미 상무야구단에도 입단 지원을 해 놓은 상태였다.
"아예 저보고 운동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닌가 싶었죠. 진짜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죠. 그런데 경찰청 테스트 날짜가 늦춰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가까스로 몸 컨디션을 끌어올려 경찰청 입단 테스트를 치렀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군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프로진출의 꿈에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기쁨에 이도윤은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 가장 행복했던 2년, 그리고 약이 아닌 독이 되어버린 짓궂은 운명
경찰청에서 그의 활약은 빛났다. 입단 첫해 80게임에 출전, 타율 3할2푼(7홈런,38타점 )을 기록해 북부리그 타격랭킹 11위에 올랐다. 지난 시즌엔 2할9푼7리(6홈런 43타점)로 랭킹 12위를 기록했다. 거의 전경기에 출전하면서 프로에서 한 시즌을 보내는 방법과 체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프로 2군들과 경기를 하면서, 이도윤은 가끔씩 2군 경기에 나서는 억대 계약금을 받고 들어온 어린 신인들의 플레이를 지켜봐야 했다. 이들을 통해 자신이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걸 느끼며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에 울컥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꿈이 있기에 웃을 수 있었다.
"첫해도 잘했지만 작년 초반엔 4할3리까지 타율이 올라 북부리그 타격1위까지 갔었어요. 그 땐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 쳐도 안타가 나올 정도로 잘 맞았죠."
그의 활약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방송사와 신문 기자가 훈련 현장까지 방문을 하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스스로 평정심을 유지하겠노라 마음먹었지만 그것은 생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뭐랄까, 마음가짐이 느슨해졌던 것 같아요. 너무 기록에 집착해서인지도 모르죠. 7월 들어 40타수 3안타밖에 치지 못했어요. 한 순간 타격이 곤두박질쳤죠. 조금만 유지했어도 수위타자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드래프트가 열리기 전날까지도 모 구단 스카우트는 마지막으로 기량을 점검하겠다며 자신을 찾아왔고, 그는 홈런과 2루타로 한껏 물오른 실력을 자랑하며 프로지명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뚜렸했다. 그러나 역시 마지막 기회에서도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 출발점에 다시 선 이웅용 아니 이도윤
"솔직히 다른 선수들에 비해 나이도 많고 부족함이 많은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서운하고 서러웠죠. 다른 팀이 데려가는 것이 아쉬울 만큼 탐나는 선수가 아니라는 거죠. 한동안 마음이 착잡했어요. 여러 군데에서 신고선수로 오라고 연락이 왔죠. 개명 신청은 롯데에 입단한 직후 접수했어요.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을 이름과 함께 잊고 싶었어요."
악재와 불운에 노이로제가 쌓여 그는 입단하자마자 새 이름을 찾아나섰고 결국 이끌 '導' 둥글 '侖'으로 '도윤'이라는 새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앞으로 경찰청 출신 이웅용이 아닌, 그냥 신고선수 이도윤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쉬지 않고 길을 돌고 돌아 가까스로 목표점에 도착했지만, 평탄치 않은 가시밭길이었다. 매번 겪어본 터라 이제 그는 덤덤하다. 되려 또 한 번 '으쌰' 하겠다는 오기와 투지가 불타오른다.
조이뉴스24 /홍희정 객원기자 ayo3star@joy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