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인터파크 CEO] (6)쇼핑몰 열기


 

우리나라에서 인터넷 쇼핑몰을 여는 일은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손에 익지 않은 기술로 수 없는 시간을 고민하면서 당시의 우리는 전자상거래 시스템 구축에 들어갔다.

상품을 공급하는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는 작업은 예외없이 ‘인터넷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나중엔 대사 외우듯 청산유수로 흘러 나왔다. 그러나 결과는 냉담함 그 자체였다. ‘그거 되겠느냐?’, ‘나중에!’ 라는 말이 으레 대답이었다.

그래도 중소기업을 운영하지만 꿈을 꾸는 몇몇 선각자(?) 분들의 도움으로 제법 구색을 갖춰 수 백 종의 상품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본격적인 쇼핑몰 사업을 시작했다.

대그룹 계열사에도 전도가방을 들고 연일 돌아다니며, ‘여기에 미래가 있으니 입점하라’고 권유했다. 그 때 무관심했던 분들이 지금은 어떤 심정일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인터파크는 인터넷 기업중 대기업들과 전면적으로 경쟁을 벌이는 유일한 기업이다. 이들과 경쟁해서 승산이 있겠느냐는 질문이 요즘 부쩍 많아졌다. 요목조목 따져서 얘기하지만 마음 속에서의 답은 따로 있다. 전자상거래는 이제 초입부에 있고 앞으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그 때와 같은 상황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중요한 것은 미래를 읽고 실천에 옮겨본 경험과 신념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같은 일 또는 사업거리를 두고서 그것이 ‘될 것’라고 믿는 신념의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신념은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나는 사람이 성공했고 안했고의 차이는 하고자 하는 사업 또는 일에 대한 신념의 차이에 전적으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많은 경우에 이 말이 예외없이 들어맞는 경우를 경험했다.

1996년 6월 1일 새벽 5시, 우리나라에서 데이터베이스로 제대로 관리되고 실시간으로 온라인결제가 되고 가정으로 배송되는 본격적인 쇼핑몰이 최초로 열린 시각이다. 인터파크 서비스의 시작이었다. 너무 뿌듯했다. 일생에 몇 번 밖에 느낄 수 없는 성취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가까운 신사동 꽃게집에서 소주로 축배를 들었다. 그 다음은 지금은 잘 정착이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공중에 떠다니는 상상의 개념들을 끌어내려 이제 골조만 갖춰진 시스템과 서비스를 채워나가는 작업이었다.

인터파크는 처음으로 한 일이 많다. 처음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열었고, 처음으로 온라인 서점, 음반점도 시작했고, 우리나라 인터넷 티케팅 서비스를 처음으로 만들어 운영해 왔고, 비즈니스를 ASP 개념으로 만들고 사업에 처음으로 적용했고, SCM을 구축해서 서비스에 처음으로 e-business 개념을 적용시켰고 등등 셀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처음으로 무엇을 하는 일’이었다. CEO로서 회사에 이같은 선각자 비용을 많이 안겨준 것도 마음에 걸린다. 지금은 시장에서 맞수(pier)가 된 많은 기업들에게 일종의 벤치마킹 사례를 풍부하게 제공했을 법 한데, 문제는 신산업이 등장하면서 반드시 발생하는 이같은 현상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

그간 중소기업이 신산업 분야를 치고 나가면 지켜보다가 제법 된다 싶으면 모든 대기업들이 경쟁에 뛰어드는 형상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의 하이에나적인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자금부족 등의 원인으로 주저앉아 버리곤 했다. 인터파크의 가장 큰 잠재적 위협은 이것이었고 그게 제일 고민이 많이 되었다. 지금은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서 세계를 경쟁상대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지만 지난 몇 년간 제일 맘 고생이 심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편안함을 얻기 위해 남에게 굽신거리려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혜성처럼 밝게 타오르려고 태어난 것이다.’라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구절이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시 96년 6월로 돌아가서 당시의 제일 큰 골치거리가 뭐였나 생각해 보면 역시 사람과 조직이었다. 데이콤에서 정직원을 공급받지 못하니 기술인력등 주요인력의 대부분이 계약직 상태로 있거나 몇몇 업체에 소속을 두고 파견을 받는 구조가 문제였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목숨을 걸었다고 얘기해도 나는 형식상으로 데이콤 직원이었다. 그런데 내가 끌고 가야 할 사람들은 모두 불안정한 고용상태라서 나에게 주어지는 심적부담이 말도 못했다. 리더쉽, 그것도 초창기의 리더쉽은 매우 견고해야 한다. 이게 손상을 받으면 발걸음을 막 떼다가 주저앉아 버리게 된다.

직원들이 말은 안해도 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구조였다. 아니 내가 너무 의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치사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내 성격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이 자리에서 밝혀 두자면 나는 잘 안됐더라도 책임을 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인터파크가 데이콤에서 분사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본사에서 뭐라고 할 지 뒷골이 아팠지만 우선 이들이 머물 회사를 지금은 큰 기술회사를 하고 있는 분에게 자본금을 빌려 별도로 차리게 되었다.

그 즈음에 마침 환경 모니터링 사업의 큰 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있었다. 나중에 데이콤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지만 그 프로젝트가 새로운 회사의 또 다른 주사업이 되었다. 멀쩡하게 두산그룹에서 촉망받던 인재가 이 사업을 위해 합류하게 되었다. 지금은 바이오벤처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권승룡이라는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인데, 회사에서 독일 유학을 보내준다는 최종통지서를 합류하기 며칠 전 찢어버리고 왔다.

새로운 회사 이름은 환경정보통신을 한다는 취지로 이네트(e-net)로 정했다. 초기 사장은 권승룡이 맡았다. 자연스럽게 인터파크 초기의 핵심멤버들은 그래서 다 이네트 소속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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