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인터파크 CEO] (7) 사업의 재미는 모든 걸 걸 때 가능


 

데이콤에 뭔가를 보여주고, 설득해 비용을 타내고, 인터파크(데이콤쇼핑몰 사업팀) 서비스를 보완 확장하고, 이네트에 속한 인력을 다독이고, 자체적으로 돈을 벌려고 환경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이러다 하루 해가 저무는 것이 1997년 10월 1일 인터파크가 데이콤의 자회사로 분사되기까지 계속되었다. 1년 반 정도의 이 시간은 나에게 거의 초인적인 힘을 요구하는 시기였다.

우선 개시한 서비스를 보완하고 확장해 가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동분서주하였으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당시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누구 말대로 소수의 진정한 매니아로 한정되어 있었다. 가상공간에 쇼핑몰을 짓고 집에서 클릭만하면 살(buy) 수 있다는 점이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도 항상 명심하고 있는 점은 고객들은 충분히 안심하고 충분히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되기 전까지는 구매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원래 계획했던 만큼의 매출과 수익이 생기지 않은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당장 데이콤에서 지적을 하고 나섰다. 데이콤 내부의 여러 사업부서와 연결하여 어떡하든 모양을 내보려고 무척이도 애를 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친분관계를 더 넓게 해 두는 것인데'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한 번 밀어주면 정말 잘 할 자신이 있는데...' 라는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도 많았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나를 몰라준다고 야속해 하는 것은 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일 뿐이다. 그 사람들도 가능성을 보고는 있지만 내 부모가 아닌 다음에는 ‘주고 받음’이 있는 수준으로 내가 맡은 부문을 키워놓아야 모든 일이 풀릴 것이었다. 그래도 어김없이 월급날은 다가오고, 자금담당부서의 눈치를 봐야 할 일은 끊이지 않았다. 죄진 것도 아닌데 자존심은 많이 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를 격려하면서 벤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내 편이 있었다. 지금 호스텍글로벌을 맡고 계신 박재천 사장님, 누가 뭐래도 나는 그 분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되신 곽치영 의원님도 당시에데이콤 사장을 맡고 계시면서 벤처에 대한 기조를 흐트리신 적이 없다. 늘 큰 일 하시기를 빌고 있다. 이런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아마 인터파크는 데이콤의 자회사로 재출범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터넷은 IT이고 새로운 통신서비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기반이 그렇다는 것이지 여기에 무엇을 얹느냐에 따라서 회사의 성격은 많이 달라진다. 결국 인터넷에서 크게 성장할 영역은 네트워크와 홈쇼핑, 홈뱅킹, VOD(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앞서 얘기한 바가 있다.

당시에 데이콤은 네트워크와 콘텐츠 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홈쇼핑은 지금 포털 회사들이 하는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가 인터파크를 통해 그리고 있었던 전자상거래 사업은 이러한 마케팅 채널을 넘어서서 유통회사 자체가 되는 것이었다. 사람을 일단 많이 모아놓고 좌판을 임대해 주는 사업과 백화점을 지어놓고 사람을 끌어들여 물건을 파는 행위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재무, 인사, 마케팅, 영업 등 회사 전 부문에서 완전히 다른 사업이 된다. 인터파크가 데이콤에서 분사하게 된 결정적 배경은 이것이다.

인터파크가 데이콤이라는 통신회사이자 콘텐츠 회사에 남아 있었으면 수백억원의 매출을 하고 연간 십억원 정도 이익을 내는 부문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은 인터넷 쇼핑몰도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그만한 브랜드 인지도와 서비스 인지도를 소비자에게 줄 수 있고, 수 백억원의 이익을 한 해에 낼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콘텐츠 회사가 아니라 유통회사여야 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마침 데이콤이라는 회사에서 그 맹아가 시작되었고, 으레 그렇듯이 수 많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안 될 것이다’ 논의가 분분했다. 나에게는 그런 논의와 결정 하나 하나가 ‘개구리에게 던지는 짱돌’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하는 힘겨운 나날이었지만,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관철시켰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고, 다 논리가 있는 얘기였는데 왜 그렇게 집착하고 반드시 좋은 세상이 온다고 밀어 부치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막 일다운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 그만두면 끝장’이라는 극한의 생각이 항상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리소스를 대 통합하여 별도의 회사를 만드는 작업, 그렇게도 어려울 것만 같았던 그 역사가 나의 무지막지한 밀어부치기에 감동(?)한 여러분의 도움으로 1997년 10월 1일에 테이프를 끊었다. 데이콤의 100% 자회사이고 스톡옵션을 조금 받는 정도였지만, 우선 그렇게도 싫고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눈치’를 안 보게 되어 좋았고,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나라를 세우면 반드시 역사에 기록되는 핵심적 인물이 나타나곤 했다던가? 꼭 피를 나누지는 않았어도 형제처럼, 사업에서 나와 떼어놓을 수 없는 파트너가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안겨다 주는 사람인 이상규 현재 인터파크 부사장이 곧바로 데이콤에서 인터파크로 전직하게 되었다. 숨겨놓은 자식과도 같았던 이네트도 이젠 떳떳이 한 식구로서 자리매김이 되었고 당분간 인터파크의 전자상거래 기술을 전담하고 나아가 솔루션을 개발하도록 했다.

그런데 즐거움도 잠시였다. 온실을 나오자 마자 IMF 한파가 몰아 닥쳤다. 제휴하기로 한 큰 회사들도 부도가 나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세상은 미래보다는 현재 터진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터파크도 생존이 문제가 되었다. 유일한 자금원인 데이콤도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집이고 회사고 한 달 한 달 먹고 살 돈이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할 태세였다. 그런데 야릇하게도 나는 끔찍히 어려웠다는 기억이 없다. 독립투사도 아닌데, 세상이 어려워지면서 데이콤과의 관계에서 나의 역할도 독립적이 되어가고 있었고, 내가 옹골지게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부모님 집 담보 맡기고 대출해서 월급을 줄 때도 덤덤했다. 세상사를 잘 몰라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평범하게 살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왔고, 나아가 나의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다는 드라마틱한 상황에 내 마음을 온통 뺏기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디어헌터의 한 주인공이 사냥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은, ‘서로 다르게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데이콤 구조조정의 파도는 제일 만만(?)하게 작은 인터파크에 먼저 다가왔다. 결론적으로 회사를 문닫고 다시 데이콤의 한 부서로 들어오라는 결정이었는데, 한 달 여를 이 문제를 가지고 몸살을 앓다가 좀 엉뚱한 제안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다시 합쳐도 돈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니, 계속 인터파크를 존속시키자. 다만, 데이콤에 손을 벌리지 않겠다.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들일 터이니 내가 회사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지고 있는 모양이 좋겠다. 데이콤이 가지고 있는 인터파크 지분의 50%를 외상으로 달라.’ 대충 이런 제안이었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고 데이콤도 당시에 걸음마 수준인 인터넷쇼핑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거나, 내가 사업을 하는 것이 죽어도 보기 싫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은 다소 수월(?)하게 받아들여졌다.

남은 것은 자금이 바닥난 회사이고 인터파크와 이네트에 있는 30여명 되는 식구들이 전부였는데, 데이콤과 계약이 체결되고 나서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이젠 완전히, 옹골지게 독립된 회사로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걱정하기보다는 나를 한없이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 한가지,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종교 같은 것이 있다. ‘유통을 하면 먹고 사는 것은 걱정없다’ 라는 생각이다. 지금도 회사가 수익을 내는 것은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이 때부터 나는 소위 진검승부를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IMF라는 끝도 없는 터널 속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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