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화기자] "이제 누구 찌르고 죽이는 건 그만, 사실적인 중년의 멜로를 하고 싶다."
중후하면서도 우렁차게 울리는 깊이 있는 목소리,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과 파워. 스크린에서 최민식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매번 보는 이를 압도한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주역에서 연기를 내려놓았던 4년.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최민식은 여전한 파워를 보여주며 새로운 전성기를 예고하고 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최민식은 반은 건달 반은 일반인인 '반달' 최익현 역을 맡았다.
노른자위 보직인 부산 세관의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직장 내 압력으로 모든 것을 뒤집어쓴 채 퇴직을 앞둔 그는 근무 마지막 날 우연히 마약 덩어리를 손에 쥐게 된다. 마약처리를 위해 만난 부산 최고의 조폭두목 '최형배'(하정우 분)가 먼 조카뻘임을 알게 된 최익현은 주먹과 어둠의 세계에 매료되게 된다.

평범한 가장이자 소시민이었던 남자가 거친 조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빠르게 변모해가는 모습을 그린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은 거침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80년대를 배경으로 권력과 비리, 주먹의 삼중주가 '나쁜놈들의 전성시대를 열어주는' 묘한 쾌감이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와 만나 강한 시너지를 발산해준다.
영화 '히말라야 : 바람이 머무는곳'으로 스크린에 복귀한 최민식은 '악마를 보았다'에서 초유의 살인마 역을 맡아 소름끼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연이어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에서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한 최민식은 "국민 살인마가 대체 뭔가, 이제 그런 역할을 사양한다"며 "멋있는 중년의 멜로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적이고 멋부리지 않는, 가슴 찡한 그런 멜로"를 하고 싶다는 최민식. 과거 브라운관을 누비던 꽃미남 청순스타에서 충무로의 대표 배우로 변신과 도전을 거듭해온 그가 보여줄 중년의 멜로도 어떨지 새삼 궁금하다.

이하 일문일답
-이 영화의 어떤 점에 끌려 출연을 결정했는지.
"아버지가 생각나는 영화다. 거칠게 산 이는 자기 얘기처럼 느끼는 영화일 수도 있겠다. 물론 직업과 환경은 다르지만. 일반적 깡패영화였으면 안했을 거다. 마초들의 배신, 우정, 이런 거 이제는 재미없다. 느와르적인 무늬(마초, 의리, 조폭)를 갖고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유머라는 필수불가결한 스타일이 가미됐다. 유머가 없었으면 안했을 거다. 유머가 단순히 즐거움을 주는 코드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더 슬픔을 자극하는 코드가 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될 수 있겠다."
"나는 곳곳에 유머가 배어있는 영화가 좋다.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주제를 얘기해도 누가 얘기하냐에 따라 다르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게 사람이 있다. 이 영화도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중구난방식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정서적으로 한번에 다 교통정리가 되는 느낌이랄까. 이건 최익현이란 한 인간의 잡담과도 같은 이야기다. 아저씨들이 자신의 무용담을 논리정연하게 뛰어난 화술로 얘기하진 않지 않나.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아저씨가 막걸리 한 잔 따라놓고 들려주는 그런 느낌을 준다. 물론 우리 영화의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기조는 풍자다. 그러나 무조건 돌만 던지는 태도도 좋은 것만은 아니다. 80년대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관통하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가부장적 아버지들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는 80년대에서 현재를 관통하는데 배우 최민식의 80년대는 어땠나.
"엉망이었다(웃음). 최루탄이 생각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휴교한 날이 등교한 날보다 더 많았던 시절이니까. 담배도 많이 폈다. 요즘이야 흡연자들이 입지가 좁아지고 있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택도 없는 소리다. 아저씨들한테 금연석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웃긴 게 난 군대에서도 화생방 조교였다. 연기와 인연이 깊은 걸까. 내 속을 알아주는 건 담배 뿐이다.(웃음) 술도 그렇다. 술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거다, 산소같은 여자만 있는 게 아니다. 웰빙이다 뭐다 깔끔 떠는 것도 안 좋아한다. 술, 담배보다 스트레스가 더 큰 문제라면 모를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헬리콥터 마미라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내려다보는 그런 엄마를 지칭한다더라. 그러면 안된다. 우리 부모는 아들의 생사 확인만 했다. 최근에 건강검진했는데 간이 꽃등심이 됐다(안 좋다더라). 영화 때문에 살을 찌운 탓도 있는 것 같다. 체중 불리느라 너무 먹어댔으까. 하지만 꼭 그 이유겠나. 평생 먹어온 술이 얼만데."
-'범죄와의 전쟁'에 대한 평가가 좋아서 고무적일 것 같다.
"고맙고 행복하다. 반응이 좋다는 건 소통이 됐다는 얘기일 거다. 영화의 주제나 의도를 공감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포지션만 다를 뿐 모두가 관객이고 사람으로서 영화를 본다. 서로 영화얘기 주고받고 느낄 때 행복하다."
-'악마를 보았다'에 이어 연달아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는데?
"임산부나 노약자 빼곤 봐도 좋지 않을까(웃음). 그 정도는 봐줘야 단련도 되고, 험난한 세상 살아가는 데 도움도 되지 않겠나."

-최익현 캐릭터는 혈연을 중시한다. 같은 최씨인데 본관은 어떻게 되나?
"경주 최는 아니다(웃음). 우리 사람들이 재밌는 게 본관 따지고 같으면 좋아한다. 동성동본 결혼금지 같은 제도도 있지 않았나. 제도에도 영향이 있고, 생전 처음보는 사람과도 연대의식를 느끼려는 경향이 강하다. 학연은 더 심하고. 우리나라 남자들이 특히 심한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혼자 있으면 나약하니 '허세'를 부린다.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아는 척하고 연줄 있는 척들 많이 한다. 일종의 방어심리도 작용하는 것 같다."
"권력에 대한 지향, 힘에 대한 지향, 힘에 대한 동경이자 관계과 연줄에 대한 과시욕이다. 그 이면은 참 측은하고 연민이 간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영화선택의 동기일지도 모른다. 영화속에 묘사되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을 합리화하려는 영화도 아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거기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은 있다. 거기에 돌만 던질 게 아니라. 남자들이 공감한다는 게 그런 측면에서 한 말이다. 남자들 불쌍하니까. 아둥바둥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애쓰고. 이 영화는 깡패영화로만 볼 게 아니라 아버지를 다룬 영화로 봐주었으면 한다."
"가편집본이 나왔을때 후배에게 영화보여주고 감상을 물었다. 보더니 자기 아버지 생각난다고 말하더라. '그럼 됐다' 싶었다. 요즘은 남자들의 가부장적 권위가 많이 약해졌다. 물론 나는 절대 그런 타입 아니다. 난 공처가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노후를 생각해서 정말 말을 잘 듣는 그런 남편이다."
-부제를 보면 나쁜 남자들의 전성시대라는 말처럼, 정의롭지 않은 일들을 해도 전성기를 누릴만큼 시대적 배경이 차지하는 의미가 큰 것 같다.
"대본을 보면서 처음에 이런 상황들이 낯설지가 않더라. 이 대본을 보고 우리 세상이다라고 공감하는게 불행한 거다. 나도 그만큼 물 들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고. 예를 들어서 아파서 병원에 가려고 해도 정상적 접수 거치지 않고 꼼수로 아는 사람을 통하던지 줄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혜택을 누리려 한다. 거기에 대해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당연하다고 느끼는 사회다. 지금 현재 정치 경제면을 장식하는,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죄의식 느끼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사회다. 우리 삶에서 더러워지고 많이 멀어져 있는 것 같다. 같이 한 번 이 똥탕을 들여다보자, 아버지를 다시금 되새겨보자는 의미다."
-함께 드라마에 출연했던 한석규는 최근 '뿌리깊은 나무'로 컴백했는데, 드라마 출연 계획은 없나.
"자신이 없다. 방송일정이 정해져 있어 무조건 나가야 되니까 부담스럽다. 쉬어갈 수 없으니. 타이트한 호흡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방송경력 8년이니 누구보다 잘 안다. 전략적으로 다시 셔터올린 바람에 공중파를 고려하다가도 자신이 없어서 포기한다. 생각하는 것조차 피곤해서 전략세우고 계산하고 그러는 거 천성이 게을러 잘 안 된다. 그저 자기가 내켜야 한다. 창작은 전략이 아니다. 영화든 TV든 연극이든 어떤 PD꺼더라 누가 나온다더라 이런 식의 접근은 별로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못한다. 그럼 표현이 그냥 나올 수밖에 없다. 공장에 물건을 찍어내듯 납품하는 게 아니다. 내가 저 세상을 살고 싶고 저 인물을 표현하고 싶어야 될까 말까다. 저거 한번 하면 뜬다, 고생 끝이다, 이런 접근태도로는 안 된다."
-'히말라야'로 스크린에 컴백했는데, 어떤 결의가 느껴졌다.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냥 거기가 가보고 싶었다. 그 영화 한편이 날 치유하고 뭐 그런 거창한 이유 아니다. 내가 원래 호기심이 많다. 주인공 최를 원래 나를 생각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안할 것 같아 얘기못하다가 내가 먼저 접근하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느낀 건 있었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살아가더라. 자연은 위대하더라. 뭐 그 정도 느꼈다. 거기에도 다 룰이 문화가 신이 먹거리가 있더라. 그런 것들이 경외롭고 위대하게 느껴졌다."
-센 역할만 연달아 하고 있는데, 멜로 연기에 욕심은 없나?
"중년의 멜로 하고 싶다. 멋부리는 거, 리차드 기어같은 그런 멜로 말고. 솔직한 얘기 그래서 가슴아픈 얘기가 하고 싶다. 멋부리지 않는 그런 멜로. 대체 국민 살인마가 뭐냐(웃음). 이제 누구 죽이고 이런 거는 그만 하고 싶다."
-이번 영화에서 많은 후배들과 함께 했다. 눈여겨보는 배우가 있다면?
"류승범. 예술가 필이 난다. 미래가 궁금해지는 후배들이 많다. 이번에 같이한 친구들은 물론이다. 같이 앙상블을 이뤘다. 선후배 간의 앙상블, 동료의식이 느껴졌다. 자신만 도드라지는 거 말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표현해내는 후배들이었다. 다들 이뻐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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