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혜림기자] 정지우 감독의 신작 '은교'는 유려한 영상미로 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잡아낸 영화다. 완성도 높은 연출은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은 배우들의 노출 수위와 파격적인 소재를 서사의 뒤편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소설가 박범신의 동명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는 70대 노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 싱그러운 관능미로 이들을 흔드는 17세 소녀 한은교의 이야기다.
극중 세 인물들이 구성하는 삼각관계는 일방향적 화살표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맥락을 품고 있다. 바로 은교를 향한 두 남성의 욕정 못지 않게 밀도있게 다뤄진 이적요와 서지우의 애증관계다.
영화의 초입, 각별한 사제지간인 이적요와 서지우가 덤덤한 얼굴로 러브샷을 하는 장면은 차후 은교를 사이에 두고 폭발할 두 사람의 감정을 세련된 방식으로 예고한다. 이들과 일상을 나누는 영민한 소녀 은교는 그 아슬아슬한 기류를 놓치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런 것까지 이야기해요? 뭐예요, 두 사람?"
영화 속 감정의 극을 오가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모습은 원작을 읽은 독자들에게 친절한 해설서로 느껴질 법하다. 원작은 이적요의 죽음을 시작으로 시인과 서지우의 글들을 병렬적으로 교차시켰다. 반면 영화는 순차적인 진행으로 인물들의 감정선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배열했다.
원작에서 이적요의 눈으로 묘사된 몇 장면들은 제3의 시점을 차용한 영화를 통해 새롭게 재구성됐다. 은교가 엄마로부터 처음으로 선물받은 거울을 바위 아래로 떨구고 이적요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줍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소설에서 거울을 줍는 적요의 행위는 은교를 향한 맹목적 감정과 서지우에 대한 경쟁 심리를 동시에 내포한다. 그러나 영화는 거울을 줍기 위해 위험한 걸음을 하는 적요, 이를 지켜보는 지우의 모습 뒤로 다소 빠른 템포의 음악을 삽입하는 과감함을 발휘했다.
서로를 견제하는 적요와 지우의 신경전, 그 진지함은 예상 밖의 웃음을 낳으며 극에 활력을 더한다. 평소 빵을 먹지 않는 적요가 은교의 샌드위치를 보며 '예술작품'이라 칭찬하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가 소설 속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은교가 적요의 가슴에 직접 헤나를 그려주는 장면도 매끄러운 연출력의 덕을 봤다. 얼굴을 스치는 소녀의 가슴에 욕망을 느끼는 적요가 젊은 얼굴을 한 자신과 은교의 정사를 상상하는 대목은 "베드신은 이야기 흐름의 고리일 뿐"이라고 말한 김고은의 설명에 설득력을 더했다.
배우들의 과감한 노출신을 담은 '은교'가 단지 '야한 영화'로 환원되지 않은 것도 같은 까닭에서다. 몽환적인 영상으로 구성된 은교와 적요의 정사신, 적나라한 격정을 그대로 담은 은교와 지우의 베드신은 말초적 감각보다는 뇌리를 자극하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감독이 특별한 애정을 드러낸 마지막 장면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원작은 이적요가 남긴 노트를 읽은 은교가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끝을 맺지만 영화는 돌아 누운 적요를 향해 고마움을 고백하는 은교의 모습으로 이를 대신한다. 담담하고 정적인 엔딩이지만 원작에 비해 뒤지지 않는 임팩트를 선사했다.
서지우라는 인물을 보다 인간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정지우 감독의 노력 역시 일견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김무열은 카메라를 향해 쉼 없이 감정을 던지며 서지우를 원작에서보다 한층 더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특히 영화의 종반부, 아버지처럼 받들었던 스승을 향한 분노와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김무열의 연기는 호평을 받을 만하다. 비극적인 그의 최후는 소설 속 간접적 묘사와 달리 생생하게 그려지며 강렬한 연민을 자아낸다.
8시간의 분장으로 70대 노인이 된 박해일은 손짓 하나까지 노인 이적요를 닮기 위해 애썼다. 그는 섬세한 내면 연기로 은교를 향한 욕망과 제자 서지우에게 품는 묘한 감정을 동시에 소화해냈다.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과 파격적인 노출로 눈길을 끈 김고은 역시 주목할 만하다. 탄탄한 내공의 두 배우 사이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은 대담함은 비범한 신예의 등장을 알렸다. '은교'는 오는 26일 개봉한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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