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혜림기자] 은막의 샛별이라기엔, 마주 앉은 김고은은 너무나 평범했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 이야기에 까르르 웃는 모습은 또래 여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폰을 쓰다 너무 어려워 쉬운 스마트폰으로 바꿨다고 말할 땐 예측 못한 빈틈도 느껴졌다. 그러나 또렷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은교'의 정지우 감독이 캐스팅 이유를 설명하며 언급한 '내면의 중심'이었다.
'은교'에서 보여준 신인답지 않은 감정 연기와 과감한 노출은 김고은을 하루 아침에 영화계 최고의 이슈로 만들었다. 현장의 감독과 배우들은 '김고은교'가 현장을 제 집처럼 누비고 다녔다며 한결같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김고은은 이제 첫 작품에 발을 들여놓은 데다 매 순간 깊은 감정을 끌어내야 하는 신인 배우. 속내까지 아무렇지 않았을 리가 없다. 김고은은 "정사 장면 촬영 전까지 '너무 너무'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내색하지 않은 것은 "불안을 드러내도 결국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불안에 너무 많이 떨다 보니 촬영 순간에는 지쳐서 고민을 놔 버릴 정도였어요. 슛이 들어가면 다 내려놓고 '그래!' 하고 연기를 해요. 그렇지만 '컷' 하는 순간은 무척 달라요. 부끄러울 수 있는 순간이죠. 그럴 때마다 선배들이 바로 담요로 몸을 덮어주며 배려해 주셨어요. 감독과 상대 배우를 의지하면서 정서적인 안정을 얻은 거죠."

'은교' 김고은이 가장 슬프게 연기한 장면은 영화의 에필로그였다.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돌아 누워 있는 이적요(박해일 분)를 향해 고마움을 담아 긴 대사를 읊는 장면이다. 그는 "첫 테이크가 영화에 쓰였다"며 "그 장면을 찍으면서는 실제로 마음에 통증이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영화 속 에필로그는 소설가 박범신의 원작 '은교'와 다른 모양새다. 소설은 이적요가 남긴 노트를 읽으며 눈물을 터뜨리는 은교의 모습으로 끝을 맺지만 영화는 보다 정적인 마무리를 택했다. 각색된 '은교'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묻자 김고은은 "있을 뻔 했지만 감독과 이야기하며 궁금증이 풀렸다"며 "결과적으로는 없는 셈"이라고 답했다.
정지우 감독은 현장이 낯설었던 김고은에게 큰 의지가 됐다. 김고은은 "처음엔 현장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난감했다"며 "콘티를 보지 않을 땐 모니터 근처를 서성이거나 멀뚱히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런 그에게 감독은 "어떤 배우는 촬영장에서 소설을 본다더라"고 말했고 김고은은 현장에서 소설 '제인에어'를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여유를 배우게 됐다.
"음악을 구분해 듣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이소라의 음악을 좋아했고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를 자주 들어요. 노래방에선 임재범의 노래도 자주 부르고요. 김광석 아저씨와 데미안 라이스, 콜드플레이도 무척 좋아해요. 아, 최근엔 버스커버스커가 최고인 것 같아요. 직접 만든 노래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에요. '여수밤바다'가 그렇게 좋더라구요."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넓다면 폭넓은 취향이다.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 김고은의 표정은 한층 다양해졌다. 데미안 라이스의 내한공연을 가지 못한 대신 거리 공연 영상을 봤다고 말할 때는 까만 눈동자가 유독 반짝였다. 신나게 이야기한 뒤에는 "이런 대화를 갈망했다"며 고개를 젖히며 웃기도 했다.

1991년생, 이제 스물 한 살이 된 김고은은 배우 이외의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막연히 "영화계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는 그에게는 DVD 수집광이자 자신의 취미를 딸과 나눠 온 아버지가 있다. 파격적인 노출신이 예고된 '은교'에 기어이 출연하겠다는 딸을 묵묵히 응원해 준 사람이다.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곧 승낙하셨어요. 아버지도 '은교'를 읽으신 상태였고 '연기로 밀고 나가는 배우가 돼라'며 응원해주셨죠. 아버지와 제 성격이 무척 비슷해요. 술을 잘 안 마시는 오빠 대신 제가 아버지와 술친구가 됐어요. 아버지와는 중국 맥주 칭따오와 소주를 섞어 마시기도 해요.(웃음)"
술 이야기가 나오자 신인 배우다운 긴장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동석한 소속사 관계자를 힐끔 보더니 "성인인데 뭐 어때"라는 답이 돌아오자 "그쵸? 영화도 성인 관람가인데요"라며 크게 웃었다. 자신이 즐겨 가는 양꼬치집을 "진짜 원조"라며 추천할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일대의 지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삶에 영향을 준 영화를 묻자 금세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첸카이거 감독의 '투게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그에게 깊은 여운을 준 작품. '밀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아달라고 부탁하자 잠시 침묵한 그는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아파져서"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매 질문 마음을 다해 답해 준 배우에게 실례일 수 있지만 40분은 김고은을 이해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깔깔대는 미소는 영락없는 스물 한 살의 것이었지만 "연기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말에는 여느 대배우 못지 않은 진지함이 묻어났다.
'은교'를 보는 관객들 역시 비슷한 고민에 빠질법하다. 러닝타임 129분은 김고은이 연기한 17세 은교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어렵지만 매혹은 쉽다. 비범한 신예가 세상을 홀릴 준비를 마쳤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정소희기자 ss082@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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