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혜림기자] 단순 범죄로 소년원을 들락거리던 16세 소년 지구(서영주 분)와 13년 만에 그를 찾아온 엄마 효승(이정현 분). 영화 '범죄소년'은 세상에 기댈 곳이란 서로 뿐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회적으로 더없이 빈곤하고 연약한 이 모자(母子)는 나아질 것 없는 삶을 쳇바퀴처럼 살아가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꿈꿀 권리조차 허락받지 못한 효승과 지구의 일상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딱 그만큼 절망적이다.
영화를 연출한 강이관 감독은 데뷔작 '사과'에 버금가는 섬세한 시선으로 '범죄소년'을 완성했다. 감독은 실제 범죄소년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물론, 이들을 품어내지 못하는 제도와 기관의 빈틈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거쳤다.
영화의 결말, 지구와 효승은 과거 각자 몸 담던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이들의 삶은 극의 시작과 비교해 전혀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지난 14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강이관 감독은 "특별한 행운이 없는 한 (영화의 결말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긍정의 힘 정도 외에는, 둘이 만나서 더 좋아진 게 없어요. 영화에선 작위적인 희망보단 그걸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둘이 만나지 않았다면, 효승은 일하던 미용실에서 더 잘 지냈을 수도 있고 굳이 술집에 가서 돈을 더 벌려는 욕망도 없었을지 몰라요. 지구 역시 엄마를 만난 반가움을 제외하면 나아진 게 없죠. 두 캐릭터를 만나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쓰면서도 고민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효승과 지구의 만남을 시작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약자들끼리 서로를 도와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을 꼬집기 위해서였다. 그는 "소년원이나 유관 단체에 가서 든 느낌은 힘 있고 여유있는 이들이 약자를 돕기보다 지구와 효승, 지구와 외할아버지처럼 약자들끼리 서로를 보듬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극 중 지구는 효승이 집을 나간 후 자신을 돌봐 준 외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아간다. 당뇨를 앓던 할아버지는 효승이 나타나기 전까지 지구가 돌봐야 할 식구인 동시에 유일한 가족이었다. 지구가 소년원에 있는 동안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뒤늦게 복지사에 의해 발견된다. 유일한 식구를 잃은 지구는 효승을 새로운 가족으로 맞으며 의지할 대상을 만난다.
"혼자가 아니라 의지할 대상이 생겼다는 것, 효승이 지구를 다시 만날 것을 꿈꾸며 함께 살 집을 알아보는 그 정도가 둘의 희망이 아닐까 해요. 그 외의 희망들은 다른 분들이 관심을 가져야 생길 수 있겠죠. 이미 바뀐 상황들을 보여줌으로써 희망을 그리는 것보다는 그 정도의 긍정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에서 청소년 범법자들의 죄질을 심판하는 재판 장면은 특히 시선을 끈다. 이 이상 사무적일 수 없을 정도로 심드렁한 말투를 구사하는 판사의 모습, 그 와중에도 성인 범법자들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판사의 말투는 자못 흥미롭게 다가온다.
강이관 감독은 "우리나라 여배우들 중 그런 판사를 연기할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지 고민하다 문소리에게 물어봤었다"며 "당시 임신 중이라 출연할 수 없었던 문소리가 서영화라는 배우를 추천했다"고 설명했다. 문소리는 감독의 전작 '사과'의 주연 배우이기도 하다.
"재판 과정을 여러 번 보면서 느낀 건 판사와 경찰, 청소년 유관 단체의 사무관 등에게 공적인 역할과 부모로서 역할이 섞여 있다는 거에요. 아이들을 안쓰러워하는 마음도 있고요. 서영화 씨도 재판을 많이 견학하면서 자신의 톤을 만들어 연기를 했죠. 나긋나긋하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엄청난 재판량 탓에 한 명 한 명을 케어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을 살렸어요."

배우 이정현은 미혼모로 아들을 낳고 가출을 했다가 13년 만에 아이를 찾아온 효승을 연기한다. 물러날 곳이 없을 만큼 나락까지 몰린 효승은 미용실 동생의 집에 얹혀 살며 수차례 돈까지 꿔 쓰는 뻔뻔한 인물이다. 거짓말을 일삼는데다 필요에 따라 절도를 범하기도 하는 그는 청소년기 지구 이상의 비행을 저릴렀을 법한 또 하나의 범죄소년. 이정현은 마치 몸에 맞춘 옷을 입은 듯 효승 역을 실감나게 소화했다.
"글로 쓰인 것과 배우가 하는 연기는 무척 달라요. 이정현은 효승 역을 나름대로 잘 소화했죠. 상대에게 부탁을 할 때도, 에너지 없는 효승이라면 무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텐데 이정현은 스스로 캐릭터에 긍정의 힘을 부여했어요. 사실 그런 상황에서 웃으면서 말하면 상대 입장에서도 '별 것 아닌가' 싶잖아요.(웃음) 그런 처세를 잘 연기한 이정현 덕에 효승은 더 밝은, 에너지 넘치고 입체적인 인물이 됐죠."
6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지구 역을 꿰찬 서영주는 청소년 연기자답지 않은 깊은 눈빛으로 캐릭터를 살려냈다. 중학교 2학년 때 영화를 촬영한 서영주는 개봉을 앞둔 현재 벌써 중학교 졸업반이 됐다. 강이관 감독은 "성장이 빠른 시기라 영주의 모습이 영화 속과는 달라지고 있다"며 "당시 키가 171cm였는데 이제 180cm라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범죄소년과 미혼모가 우리 사회에서 겪는 소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강이관 감독은 섬세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제도와 규율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 역시 강조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범죄소년과 미혼모 문제 뿐 아니라 육아나 교육 문제도 개인에게 맡기곤 한다"며 "개인에게 문제들을 떠넘기고 '잘 되면 좋은 것, 아니면 네 탓' 식으로 나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우리 나라의 제도나 규율, 유관 단체들이 섬세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극 중 지구가 판사 앞에서 혼자 남을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장면이 있는데 판사는 '누가 누굴 걱정하냐'고 말하잖아요. 판사의 입장에선 지구를 소년원에 보내는 게 맞겠죠.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사회복지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고요. 각 제도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집중하다보니 그 사이의 공백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실적 등으로 각광받지 못하는 일들은 개인이 떠맡게 되는 현실에 문제가 있죠."
한편 '범죄소년'은 도쿄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오는 22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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