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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10년]한국스포츠 10년 빛낸 10인의 스타⑨장미란


올림픽에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정상 석권…은퇴 후 IOC 위원 목표 첫 발

[한상숙기자] 장미란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98년 처음으로 바벨을 잡았다. 다른 선수보다 출발이 늦었지만 타고난 신체조건을 앞세워 고등학교 무대를 휩쓸고 다녔다. 장미란은 역도를 시작한 지 4년 만인 2002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그 해 부산아시안게임 75㎏이상급 은메달을 시작으로 각종 국제대회를 석권하며 국내 최강의 여자 역사(力士)로 거듭났다.

10년 전인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의 은메달은 장미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당시 장미란은 용상 3차 시기까지 마친 뒤 합계 302.5㎏을 기록, 금메달을 눈앞에 뒀지만 마지막 3차 시기에서 10㎏을 늘린 탕공홍(중국)에 뒤져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탕공홍의 자세에 대해 판정시비가 일기도 했으나 장미란은 "은메달도 값진 선물"이라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장미란은 아테네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역도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장미란은 이후 세계를 제패했다. 2005, 2006, 2007,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를 달성했고,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여자역도 최중량급 정상을 놓치지 않았다.

'장미란시대' 열었다

장미란은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자신의 독주시대를 열었다. 여자 최중량급 경기에서 인상 140㎏, 용상 186㎏, 합계 326㎏으로 세계 정상을 번쩍 들어올렸다. 인상과 용상, 합계 기록을 모두 다섯 차례나 갈아치운 세계신기록이다.

아테네올림픽의 은메달 한을 푼 값진 금메달이기도 했다. 4년 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탕공홍은 이미 바벨을 놓은 상황. 장미란은 탕공홍의 뒤를 이은 중국의 강자 무솽솽과 경쟁을 벌여왔다. 장미란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선수권을 석권하면서 무솽솽과의 금메달 경쟁 구도는 점점 장미란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올림픽을 앞두고 라이벌 무솽솽의 대회 불참 소식이 전해졌다. 역도 강국 중국은 국가별 '4인 출전제한'에 따라 장미란이 버티고 있는 +75㎏급에서는 금메달 획득이 힘들다고 보고 무솽솽을 출전시키지 않았다. 당시 장미란은 "무솽솽이 불참한다는 소식에 기분이 묘하다"고 말했다.

경쟁자가 사라진 올림픽은 장미란의 독무대였다. 사실상 금메달은 확정한 상황. 관심은 세계신기록 작성에 쏠렸다. 장미란은 인상 1차 시기에서 130㎏을 신청해 안정적으로 바벨을 들어 올린 후 2차 시기에선 올림픽 기록인 136㎏, 3차 시기에선 세계기록인 140㎏을 거푸 성공시켰다. 장미란은 이어진 용상 1차 시기에서 175㎏의 바벨을 들어올려 일찌감치 금메달을 확정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합계 세계 신기록 경신이었다. 장미란은 2차 시기서 깔끔한 저크 동작으로 183㎏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합계 323㎏의 세계 신기록이었다. 하지만 장미란은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 3차 시기서 186㎏을 신청, 이마저도 단번에 성공시켜 신기록을 행진을 벌였다.

최악의 조건도 이겨낸 금메달

2010년은 장미란에게 힘겨운 해였다. 출발부터 불안했다. 장미란은 1월 교통사고를 당했다. 큰 부상은 당하지 않았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졌다. 장미란은 통증 때문에 동계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고질적인 부상인 허리디스크도 장미란을 괴롭혔다. 결국 9월 치러진 세계선수권에서 인상 130㎏, 용상 179㎏으로 합계 309㎏을 들어올려 종합 3위에 머물렀다. 2005년 도하 대회부터 이어오던 세계선수권 5회 연속 우승도 좌절됐다. 역도를 시작한 뒤 매년 기록을 늘려왔던 장미란이 부상에 발목을 잡히며 처음으로 좌절을 맛본 것이다. 그동안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는 맹활약했지만 유독 아시안게임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던 장미란은 또다시 불안해졌다.

그러나 장미란은 모든 고통을 묵묵히 인내했다. 그리고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또 한 번 땀의 결실을 맺었다. 장미란은 여자 최중량급에서 인상 130㎏, 용상 181㎏, 합계 311㎏을 들어 올려 1위에 올랐다. 장미란의 아시안게임 첫 우승이었다. 장미란은 멍수핑과 같은 기록을 냈으나 몸무게가 더 가벼워 금메달을 획득했다.

경기장을 찾은 장미란의 아버지 장호철 씨의 '부정'도 화제가 됐다. 장 씨는 장미란이 금메달을 따내자 한국 관중을 향해 큰절을 했다. 장미란은 우승을 확정한 뒤 아버지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은퇴…스포츠 꿈나무 후원하며 IOC 위원 꿈 키워

현역 마지막 무대는 과연 장미란다웠다. 장미란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도 출전해 인상 125㎏, 용상 164㎏, 합계 289㎏을 들어 올려 4위를 기록,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마지막 용상 3차 시기에서 170㎏에 실패한 뒤 장미란은 관중을 향해 큰절을 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장미란은 참았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전성기가 지났고 쉼 없는 훈련과 부상 등으로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경쟁자들의 급성장도 장미란을 위협했다. "자고 싶을 때까지 편하게 자고 싶다"는 장미란의 말에서 인고의 시간이 묻어났다. 그리고 장미란은 은퇴를 결심했다.

2013년 1월 치러진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장미란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단상에 올라 준비해온 원고를 읽으면서 연신 눈물을 훔쳤다. "역도선수 장미란입니다"라는 인사를 전하면서부터 쏟아진 눈물은 원고지 두 장을 모두 읽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런던올림픽을 마치고 전국체전을 치르면서 은퇴를 고민했다"고 전한 장미란은 "올림픽이 끝난 뒤 더 좋은 기록을 남기고 은퇴하고 싶었지만 몸과 마음을 생각해 아쉬움 없이 정리했다. 시원섭섭하다"고 말했다. 장미란은 이 자리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의 꿈을 공개하기도 했다.

장미란은 은퇴 후 '장미란재단' 사업에서 인생의 두 번째 목표를 찾았다. 비인기 종목 선수 및 스포츠 꿈나무를 후원하는 장미란재단은 찾아가는 멘토링 서비스, 장미운동회 등을 개최해 곳곳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장미란의 뜻을 전해 들은 후배들도 적극적으로 멘토링 서비스에 참여하고 있다.

국제역도연맹 초대 선수위원으로 선임된 장미란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리는 세계역도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지난 6일 출국했다. IOC 선수위원을 꿈꾸는 장미란은 은퇴 후 바벨을 들 때보다 더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조이뉴스24 한상숙기자 sk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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