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프로야구가 성장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가 재일동포 선수들이다. 프로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초창기, 이들은 '선진 야구 기술'의 전수라는 측면에서 리그의 수준 향상에 적잖은 공헌을 했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야구규약(1982년에는 협약(協約)이라 표기)에 '해외교포선수' 조항을 만들었다. 원래 안은 창립 이후 3년 뒤인 1985년부터 해외 거주 한국인을 KBO의 울타리로 끌어들인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원년인 1982 시즌을 치러본 결과 팀들간 전력불균형이 무척 컸다. 결국 계획을 수정해 다음 해인 1983년부터 '외국에 거주하면서 부계가 한국적인 재외 한국인'을 합류시키기로 했다. 이 조항에 의거해 각 구단은 한국계이면서 해외 프로야구 경험자를 찾기 시작했다. 출범 초기에는 지금처럼 많은 정보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적이 있는 선수들이 주된 영입 대상이었다. 결론은 재일동포 선수들이었다. 1983년 대거 합류한 이들 가운데 유독 큰 발자취를 남긴 몇몇 선수를 재조명해본다.

◆모범적 순기능
▲김일융(金日融, 니우라 히사오·新浦壽夫)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3년간 활약했다. 특히 1977~1978년 2년간 팀 에이스로 활약한 수준급 투수였다. 방어율왕 2회, MVP 1회에 빛나는 선수였다. 영화배우와 같은 외모에 멋진 패션감각을 자랑했다. 인상 및 분위기부터가 거물투수 다웠다. 그는 술자리에서도 수준급의 노래솜씨와 깨끗한 매너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술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술집 분위기를 좋아했다. 언어, 문화 등 한국 생활 전반이 생소하고 외로웠지만 그는 야구선수로서 예의바르고 모범적이어서 한국 후배 선수들의 큰 귀감이 됐다.
▲홍문종(洪文宗, 도쿠야마 후미무네·德山文宗)
교토의 사립명문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서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1976년 드래프트 2위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현재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했지만 2군 생활이 길어지자 1980년 롯데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로 트레이드 됐다. 1984년 롯데 자이언츠의 러브콜을 받고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우리말을 열심히 공부했고, 심지어 동료들과의 소통을 위해 부산 사투리를 표준어로 익혔다. 경기 전이나 후에도 야구 장비를 깨끗이 정비하는 등 준비가 착실한 모범적인 선수였다"고 그를 회고했다. 홍문종은 심지어 농담도 전혀 하지 않고, 술·담배도 멀리 했다. 한국에서 받은 연봉은 거의 일본으로 송금했다. 말 그대로 모범생이었다.
▲김무종(金茂宗, 기모토 시게미·木本茂美)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일본 동양고등학교에서 주전 포수로 활약한 뒤 히로시마 카프 2군을 거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그의 해태 입단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히로시마 구단과 이듬해 연봉 360만엔에 계약을 체결한 상태여서 문제가 복잡했다. 김무종은 임의탈퇴(일시적으로 일본야구계를 떠남. 일본으로 돌아갈 경우 히로시마 구단으로만 복귀 가능) 신분으로 히로시마에서 트레이드 되는 형식을 통해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이적료는 자신의 계약금에서 물어줬다. 처음 히로시마는 500만 엔이란 거액을 요구했으나 당시 KBO 총재 특별보좌역이던 '재일동포의 대부' 장훈의 중재로 350만 엔에 이적을 받아들였다. 무려 10년간 한국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며 '해태 왕조'의 전성기를 함께 한 그는 삼성에서 배터리 코치로 2년간 지도자 생활까지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히로시마에서 장거리 트럭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선동열의 황금시절 콤비로 유명하다.
▲송일수(宋一秀, 이시야마 가즈히데·石山一秀)
1984년 스타 투수 김일융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긴테쓰(近鉄) 버팔로스(현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주로 2군 포수로 뛰었다. 삼성 입단 당시 33세였지만 머리가 벗겨진 탓에 코치가 온 줄 알았다고 당시 삼성 라이온즈 2루수였던 천보성은 회고한다. 송일수는 팀의 주전포수인 이만수의 그늘에 가렸지만 중요한 경기에서는 이따금씩 활약을 했다. 당시 대구시민구장 야구장에는 라커룸이 없었다. 경기 후에 선수들은 계약한 대중목욕탕을 이용했는데, 송일수는 주전급 선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훌훌 옷을 벗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또한 버스이동시 가끔 제공되는 생소한 도시락 냄새가 좀 어려웠다고 한다. 송일수는 "기본적으로 공 받는 것을 좋아해서 포수가 된 것 같다"고 한다. 한국에서 착실히 선수생활을 마친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라쿠텐(樂天) 골든이글스에서 스카우트 부장으로 프런트 업무를 맡았다. 다시 한국으로 와서 2014년 두산 베어스 감독까지 맡았다. KBO리그에서 활약한 재일동포 선수 중 한국 구단의 사령탑을 맡은 유일한 케이스였다. 그는 "야구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같다. 단지 그런 야구를 본인이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모범적인 생활과 행동은 프로초창기 한국 선수 및 지도자, 구단 관계자 등에게 좋은 인상과 기억을 남겼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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