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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족이 지켜준 길, 진심으로 살아온 시간: 박홍근 이야기


“바르게, 따뜻하게, 그리고 묵묵히”

[조이뉴스24 박상욱 기자]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서울 중랑을)은 네 차례 연속 국회에 입성한 4선 중진 의원이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정치인’이 아닌 ‘개인 박홍근’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전남 고흥의 가난한 농촌 소년에서 청년 시절의 저항과 투옥, 시민운동가를 거쳐 정치인이 되기까지, 그리고 한 가족의 남다른 가장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과 목소리에는 고향 햇살 같은 따뜻한 온기와 묵직한 열정이 배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의원 [사진=박홍근의원실]

■ 고흥의 햇살 아래 자란 소년

전남 고흥의 겨울 햇살은 그에게 언제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난했지만 따뜻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초겨울 날, 정말 슬펐지만, 할머니의 손길 같은 햇살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제 인생의 첫 위로였던 것 같아요. 가난했지만 고향은 언제나 저에게 편안함과 힘을 주는 곳입니다.”

그가 말하는 ‘고흥의 햇살’은 어린 시절의 슬픔마저 품어준 따뜻한 빛이었다. 그 시절은 모두 그랬지만, 특히 그의 유년 시절은 지독히도 가난했다. 하지만 그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소아마비를 앓던 친구의 가방을 초등학교와 중학교 내내 들어주며 함께 등하교했고, 길에서 주운 돈을 경찰에 맡긴 일로 전라남도의 ‘착한 어린이상’을 받기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어요.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적 그는 정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참된 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정론직필, 옳은 말을 쓰는 정직한 기자가 되어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대학에 진학한 그는 세상이 그의 양심을 크게 흔드는 것을 경험했다. 경희대 국문학과 신입생이던 그는 광주의 망월묘지를 5월에 찾았다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이들의 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 깨달았어요. 저 혼자 편하게 살면 안 되겠구나! 세상을 위해 살아야겠구나!” 대학생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명령에 항의하다 고생했다고 한다. 그 직후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찰서 유치장을 자주 드나들었고 시위를 주도하다 구치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감옥 안도 관계와 질서가 작동하는 작은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양심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그것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박홍근의원 학창시절 친구와함께 [사진=박홍근의원실]

■ 시민운동과 나의 행복

대학을 졸업한 그는 힘든 사회운동의 길을 선택했다. “그때는 정치인이 된다는 것이 현실과 비겁한 타협이라고 여겼습니다. 현장에서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제 길이라고 믿었죠.”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시민단체의 월급만으로는 옥탑방 월세를 내기도 벅찼다. 그럼에도 그는 ‘이타(利他)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1994년 문익환 목사가 만든 통일단체를 시작으로, 우상호, 임종석 선배들과 함께 만든 청년단체에서 5년 간 실무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결혼을 앞두고 서울시에 들어가 공무원으로 생활하기도 했지만, “틀에 갇힌 삶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며 다시 시민운동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에도 시민운동가의 삶은 궁핍했다. “결혼 초반에는 정말 어려운 시기를 겪었어요. 연상인 아내가 유산으로 많이 힘들어했죠. 그때 제대로 지켜주지도, 돈을 벌어다 주지도 못했어요.” 그는 당시를 “결혼생활에서 가장 미안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제 아내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직장에 다니면서도 다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편찮으신 장모님을 돌보며, 다시 태어난 딸아이를 키우고, 교회 봉사활동까지 하더군요. 아내가 원더우먼으로 보이더라고요. 그 사람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아내는 제 인생 최고의 반석입니다.”

박홍근 의원은 집안일을 잘 분담하는 ‘살림하는 남편’이었다. “예전에는 집안 청소, 설거지, 빨래는 제 몫이었고, 분리수거도 했는데,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는 그런 시간을 자주 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26년째 지켜온 작은 일상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일요일 밤이면 반드시 다림질을 합니다. 일주일치를 양복을 펴고 와이셔츠를 준비해두죠. 그 시간은 제 마음도 정리되는 작은 몰입의 순간입니다.”

가족에게 그는 어떤 사람일까? “아내는 ‘공직자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딸은 ‘참 존경하는 아빠’라고 표현해 주었습니다. 공적으로는 어느 정도 인정받았지만, 남편이자 아빠로서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족에게 미안함을 숨기지 않았다. “결혼 25주년 기념여행도 결국 가지 못했어요.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박홍근의원 졸업사진 [사진=박홍근의원실]

■ 인생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는 자신을 “게으름과 두려움, 두 적과 싸워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게으름을 이기고 두려움을 떨치는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삽니다. 저는 게으름은 이겨냈지만, 낯선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는 아직도 늘 싸우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휴식은 혼자 산에 오르거나 걷는 시간이다. “집 근처 봉화산이나 묵동천 등을 한 시간 걷거나 뛰어요. 머리를 비우고 다시 사람들을 만날 준비를 합니다.”

그에게 물었다. ‘인간 박홍근’으로서 세상에 남기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는 잠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바르게, 따뜻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인터뷰의 마지막에서 그는 젊은 세대를 향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했다. “요즘 청년들을 ‘이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지금은 ‘축소의 시대’가 아니라 ‘확장의 시대’입니다.” 그는 과거 산업화 세대가 양적인 성장을 추구했다면, 지금 세대는 개성과 창의력으로 세상을 넓혀가는 세대라고 강조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영향력은 훨씬 커졌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기술, 지식, 예술, 문화 등 어떤 영역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어요.”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기성세대의 역할은 청년들에게 공정한 출발선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재산이나 배경이 인생을 결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정치인의 의무입니다.

저는 그 디딤돌을 놓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의 세상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각자의 개성과 진심으로 세상을 확장해 주세요. 그 출발점만큼은 우리가 반드시 공정하게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홍근의원 가족사진 [사진=박홍근의원실]

■ “바르게, 따뜻하게 그리고 묵묵히”

박홍근 의원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이타(利他)’다. 누군가를 돕고 함께 나누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안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 그의 인생은 아주 화려하지 않지만, 묵묵히 사람답게 살아온 한 인간의 기록이다.

그의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다. 가난한 농촌 소년이 정의를 꿈꾸는 청년으로 성장하고, 역경 속에서도 가족과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한 인간의 이야기다. 정치인이 되기 이전에도 그는 여전히 ‘착한 어린이 상’을 받았던 그 소년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마음이 여전히 그를 움직이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전히 배우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서, 세상으로부터 늘 배웁니다. 바르게, 따뜻하게 그리고 묵묵히 살고 싶습니다.”

/수원=박상욱 기자(sangwook@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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