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혜림기자] 박찬욱 감독이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로 국내 관객을 만난다.
22일 서울 남산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취재진과 만난 박찬욱 감독은 단 한 명의 한국 배우도 등장하지 않는 영어 영화 '스토커'를 연출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풀어놨다. 그간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등으로 그만의 독특한 연출 세계를 펼쳐왔던 박찬욱 감독은 스릴러 장르의 할리우드 영화 '스토커'에서 18세 소녀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 분)의 성장담을 그린다.
인디아는 삼촌 찰리(매튜 구드 분)의 등장으로 자신의 몸에 흐르는 '스토커' 가의 피를 깨닫는 동시에 성(姓)적 본능에도 눈을 뜨게 된다. 박 감독은 '스토커'를 "소녀가 어른이 되며 느끼는 혼란을 그린 영화"라고 설명한 뒤 "결국 남성이 상상하는 이야기지만 동갑내기 딸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옆에서 본 감상도 들어 있다. 엄마와 딸 사이의 만국 공통의 애증 관계도 그렇다"며 웃어보였다.
'스토커'는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석호필'('스코필드'를 부르는 한국 팬들의 애칭) 웬트워스 밀러가 시나리오를 맡아 더욱 화제를 모았다. 박찬욱 감독은 앞서 지난 21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웬트워스 밀러의 시나리오를 "여백이 많아서 붓을 댈 곳이 많아 좋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박 감독은 웬트워스 밀러가 '스토커'의 완성본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묻는 질문에 "아직 못 들어봤다"며 "물어보라고는 했는데"라고 답하며 웃어보였다.
"작가로서 아주 재능이 있다. 젊은 남자 배우의 첫 작품이다. '젊은, 남자, 배우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볼 때 정말 놀라운 것 같다. 여자 배우였다면 덜 놀랐을 것 같다."
극 중 인디아 역은 1989년생, 오스트레일이라 출신의 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가 연기했다. 바시코브스카는 인디아의 경험과 성장을 그려내는 데 큰 역할을 한 피아노 신을 근사하게 소화해 호평을 얻었다.
박찬욱 감독은 "피아노 신은 웬트워스 밀러의 각본에 있던 장면이었다"며 "피아노 곡 작곡가 필립 글래스를 만났을 때 '이 곡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시더라. 사랑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고 알렸다.
"멋진 남자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여자에게 몰래 다가간다. 남자는 처음엔 엉거주춤 앉아서 피아노를 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앉는다. 그러면서 '야, 좀 받아줘'하며 연주를 하고, '흥' 하던 여자가 역습을 한다. 위에서부터 하강하는 듯한 선율을 연주한다. 공격 같지만 사실 반응하는 거다. 신이 나서 주거니 받거니 점점 상승 고양된다. 섹스와도 같은 거다. 절정으로 오를 때 남성이 팔을 두르는 장면, 그것은 그야말로 섹스다. 여성이 더 흥분하고 절정을 느낄 때는 남자가 사라져 버린다."

박찬욱 감독은 작곡가 필립 글래스와 대화하며 '스토커'의 명장면 중 하나로 여겨질 법한 이 피아노 신에 보다 강렬한 요소를 삽입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랑, 연애, 섹스의 모든 과정을 표현한 장면이니 음악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며 "극 중 찰리(매튜 구드 분)가 팔을 두르는 것은 작곡가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해 시선을 모았다.
"원하는 것을 설명했더니 '재밌는 일이 있는데, 내가 네 개의 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만들었는데 부부 연주자가 이걸 연주할 때 이렇게도 할 수 있다고 보여주더라'며 '그게 참 에로틱하다고 감탄했다'고 일화를 이야기해줬다. 집에 가서 시나리오를 바로 고쳐 썼다. 영화는 참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 만들어진다."
'스토커'는 인디아의 18세 생일에 존재도 몰랐던 삼촌 찰리가 그를 찾아오며 일어나는 기묘한 이야기를 그린다. 박찬욱 감독은 18세 생일을 사건의 발단으로 설정한 이유를 알리며 "원래 각본에 있던 내용인데 훨씬 강화했다. 완전히 새롭게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초점을 더 분명히 하고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18세 생일을 이야기하면서 집어 넣은 내용은 매년 같은 구두가 배달돼 왔다는 부분이다. 사이즈에 맞춰 어떻게 늘 똑같은 신발이 배달됐을까. 인디아는 선물을 보낸 이가 아빠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가 죽었는데도 빈 선물 상자가 배달돼 왔다. 여태 보낸 것은 삼촌이었고 이번에는 하이힐을 가져온 거다. 성장에 초점을 둔 쪽으로 각색했다. 나이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 분)이 딸에게 들으라는 듯이 '어린 와인은 먹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딸을 사랑의 라이벌로 보는 거다. 그런데 사실 그 와인은 찰리(매튜 구드 분)가 인디아를 위해 사 온 거였다. 나이에 집중한 성장 이야기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만든 내용이다."
한국과는 무척 달랐던 미국의 영화 현장은 촬영 첫 날부터 박찬욱 감독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첫날에는 찍고 재생해서 보자고 했더니 '재생을 왜 하지?' 하는 반응이었다"며 "배우들은 이 쪽으로 오지도 않고 멀리 서서 멀뚱멀뚱 보고 있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조감독은 '뭐가 마음에 안 드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고 마음에 들면 다음 장면을 찍자'고 하더라"며 "배우들 역시 '오케이냐, 한 번 더 하냐'고만 묻는다. 미국 현장에선 재생해 볼 시간이 있으면 한 번 더 찍자는 식이었다"고 덧붙였다.
"못 찍은 신은 없지만 한 신 한 신을 공들여 찍었어야 했다. 그렇다고 대충 찍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한 번 테이크를 가면 모니터로 보는데 미국에선 그런 게 없다. 현장 편집의 개념조차 없는 셈이다. 우리에겐 현장 편집이 익숙해져 있는데, 그것을 못하니 정확하게 잘 찍히고 있는지 모르니까 불안했다. 현장 편집은 꿈도 못 꾼다. 불안한 상태에서 찍다가 내가 데뷔할 때도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현장 편집은 들어본 적도 없었고, 모니터 재생이 아니라 모니터가 없는 상황이었다. 촬영 감독의 파인더가 아니면 장면을 볼 수가 없었고 심지어 신인 감독에겐 파인더를 안 보여줬다. '스토커'는 나중에 편집실에서 보니 잘못 찍힌 건 없었다.(웃음)"
이날 박 감독은 영화 '박쥐' 작업을 마친 후를 떠올리며 "감독으로서 전환점이 필요했다"고도 고백했다. 그는 "첫 영어 영화라는 점에서는 다시 데뷔하는 기분이 들었다"며 "'박쥐'를 끝냈을 때 나는 전환이 필요했다. 굉장히 길게 준비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10년 구상했던 '박쥐'가 끝나니 내 영화 경력에 한 챕터가 정리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쥐'는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한 영화였다.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나'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기가 잘 맞기도 했지만, 그래서 영어 영화 '스토커'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새 출발하는 기분이 여러 모로 들었다. (할리우드에서) 한 편 쯤은 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권하고 있다. 아직 결정된 차기작은 없다."
'스토커'에는 미아 바시코브스카·니콜 키드먼·매튜 구드 등이 출연한다.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이자 제작자인 리들리 스콧과 故 토니 스콧 형제가 제작했다. '블랙 스완'의 클린트 멘셀이 음악 감독을 맡았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의 정정훈 촬영감독이 다시 한 번 박찬욱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오는 28일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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