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기]인문학, 기술 그리고 융합형 인재


[김석기의 IT 인사이트]

애플이 아이폰을 성공시킨 이후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학문은 '인문학(Liberal Arts)'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프리젠테이션에 나와 애플 성공의 비결이 인문학이라고 말하자 마자 언론을 선두로 각종 인문학 전문가가 등장하여 인문학을 팔기 시작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인문학 관련 책과 강연, 기사, 인터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한국에는 인문학의 전통이 없다. 물론 한국에도 역사나 중국에서 들어온 동양철학과 이를 발전시킨 철학, 문학, 예술 등이 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이야기한 서양의 인문학(Liberal Arts)과는 완전히 다르다. 포크송(Folk Song)을 민요라고 번역하지만 한국의 민요와 포크송은 형식이나 내용, 정서적인 면에서 완전히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정확히 매칭하여 번역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예전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노래'라는 관점에서 편의상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서양 인문학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문화에서 출발하였으며 철학과 역사, 고전문학, 문예, 언어, 종교, 미술사, 음악사, 공연예술 등을 총망라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인문학이란 '서양에서 인간에 관한 학문들의 집합'을 말하는 것으로 개별적인 전공과목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문학은 특히 신에서 인간으로 중심이 바뀐 르네쌍스 시대에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이라는 말은 '사용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제품을 개발했다'는 말을 좀 있어 보이게 표현한 것이다. 비교하자면 대입시험에 수석한 학생과 인터뷰했을 때 '학교수업과 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복습을 철저히 했다'라고 대답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문학팔이들이 재미를 보자 다른 한쪽에서는 '융합'이라는 키워드를 팔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에 '인문학'에 해당하는 것이 없자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서 '교차점'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한동안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과 통섭을 통한 창의적 인재라는 유행어가 들불처럼 번져 갔으며 모 회사에서는 작년에 인문계 대학 졸업자 중 선발하여 6개월간 소프트웨어를 가르쳐 단기간에 융합형 인재를 만들겠다는 프로젝트까지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웹사이트에 공고만을 봤기 때문에 실제로 문과생들을 뽑아 소프트웨어를 6개월간 가르치고 통섭형 인재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결과를 알수는 없지만 2013년의 첫 번째 모집 공고 이후 2014년 모집공고가 검색되지 않는 것을 봐서는 그 결과가 회사의 기대에 못미친 것 같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한국인으로서 가장 완벽한 융합-창의 인재의 표상은 고 백남준 선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남준 선생을 한국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는 단순한 미술작가가 아니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한 후 홍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동경대에 입학하여 학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음악사학을 부전공한 후 졸업하였다. 다시 서독의 프라이부르크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뮌헨의 루트비히 막시밀리안대학교에서 철학석사와 음학사학석사를 받았다.

루트비히 막시밀리안대학교는 1472년에 개교한 유럽에서 가장 전통있는 명문대학 중 하나이다. 미국에서는 세계 최고의 명문 미술대학인 뉴욕의 프렛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고 역시 세계 최고의 공대인 MIT 전자학과에서 교수초빙을 받을 정도로 전자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언어에서는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으며, 홍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광동어도 능숙했을 것이다. 백남준 선생이 이룩한 업적은 이러한 다채로운 문화적 배경과 그의 철학/역사/미술/음악/전자학의 전문지식을 기반으로 융합적 사고와 창의를 바탕으로한 통섭에서 나온 결과물인 것이다.

백남준 선생이 융합적 인재가 된 것은 단순히 그가 대학에서 여러 가지 학문을 전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에서 유소년기를 보내고 홍콩에서 고등학교시절을, 청년기에는 동경과 독일에서 살았으며 1964년 이후 뉴욕에 이주하여 활동을 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자양분이 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다양한 문화, 역사, 철학을 중심에 두고 있다.

백남준 선생을 보면 융합적 인간은 일단 두뇌가 좋아야 한다. 대학 졸업 이후 대학원의 진학은 머리보다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 더 많이 반영되지만 백남준 선생이 졸업한 동경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학부 중 하나이다. 백남준 선생은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범인이 동경대 같은 세계적인 명문대를 나왔다면 이를 스펙삼아 평범한 회사원으로 잘 살아갈텐데, 백남준 선생은 이에 그치지 않고 독일로 가서 계속 공부를 했다.

역시 보통 사람이라면 독일에서 학위를 따고 교수직을 구했겠지만 백남준 선생은 교수를 하기 위해 석사 공부를 한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MIT 교수제의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잘 모르는 수 천명의 MIT 교수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독일에서 미술과 철학, 음악사학을 공부한 것은 지식에 대한 탐구욕이다. 융합적 인재의 소양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노력을 통해 여러 분야의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융합적 인재는 절대 단기간에 공장에서 제품 만들듯이 생산되지 않는다. 백남준 선생 같은 천재도 거의 2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 달랑 대학에서 4년간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6개월간 소프트웨어를 가르친다고 융합적 인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백남준 선생처럼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융합적 인재는 융합적 사고를 위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참을 수 없기에 한국 기업에 융합적 인재가 생기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김석기 (neo@mophon.net)

모폰웨어러블스 대표이사로 일하며 웨어러블디바이스를 개발 중이다. 모바일 전문 컨설팅사인 로아컨설팅 이사, 중앙일보 뉴디바이스 사업총괄, 다음커뮤니케이션, 삼성전자 근무 등 IT업계에서 18년간 일하고 있다. IT산업 관련 강연과 기고를 통해 사람들과 인사이트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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