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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인생을 새기는 칼끝의 철학, 인장공예 명장 1호 최병훈


억겁의 시간을 깎아 ‘신뢰’를 쌓다.

[조이뉴스24 박상욱 기자] 14세 소년, 조각칼 한 자루로 서울에 서다.

2026년 봄날, 서울 강북구의 고즈넉한 작업실 ‘여원전인방(如原篆印房)’에 들어서면 기계음 대신 칼이 단단한 재질을 긁어내는 미세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곳에서 인장(印章)을 빚어내는 최병훈 명장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과 묵직한 손마디를 지니고 있다.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글자와 씨름해온 그는 인장을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예술혼’이라 부른다.

최병훈 명인 [사진=여원전인방]

그의 인생은 전라북도 장수의 산골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가운데 중(中)’, ‘일어날 흥(興)’ 자를 익히며 먹 향기를 맡던 소년은,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별세와 함께 가세가 기울자 단돈 몇 푼을 쥐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서울에서의 첫 삶은 고단했다. 이발소 세신공으로 손님들의 머리를 감기고, 종로 서예 학원의 사환으로 일했지만, 밤마다 라디오 통신 강의록으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칸막이 뒤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글씨는 그에게 ‘필경사(筆耕士)’라는 직업을 안겨주었다. 그는 중앙여고 필경사로 5년, 군 행정병으로 3년을 보내며 수만 장의 시험지와 관공서 문서를 써 내려가던 그의 손은 어느덧 글자의 결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쇄 기술의 발달로 타자기와 복사기가 등장하며 필경사의 자리가 사라지자, 그는 ‘글자와 평생 함께할 수 있는 길’을 고민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인장이었다.

- 0.01mm의 뒤틀림도 허용하지 않는 ‘집념의 미학’

최 명장은 인장을 시작하자마자 지독한 공부에 매달렸다. 그는 서울 시내 1,000곳이 넘는 도장 업소를 자전거로 직접 돌며 ‘잘되는 집’의 비결을 관찰했다. 어떤 곳은 시설이 화려했고, 어떤 곳은 책상 하나뿐이었지만, 공통점은 남들이 30분 만에 끝낼 일을 두세 시간씩, 때로는 하루 종일 매달려 공들여 만든다는 점이었다. 그는 0.01mm의 오차에도 글자가 기울어진다는 예리한 감각을 익히며 자신만의 가치를 지켜나갔다. 작업실 한쪽을 가득 채운 중국과 일본의 자료들은 그 집념의 증거다. 언어를 몰라도 도장의 형상만을 보며 연구를 이어온 그는 “꾼끼리는 느낌이 온다”고 말한다.

최병훈 명인 과거사진 [사진=여원전인방]

특히 최 명장은 대중이 혼동하기 쉬운 '전각'과 '인각'을 엄밀히 구분한다. "전각은 돌처럼 부드러운 재질에 새기는 대중적인 예술인 반면, 인각은 나무나 상아처럼 단단한 경질 재료에 정밀한 기법으로 새기는 고도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그는 2001년 대한민국 인장공예 1호 명장에 선정되며 인장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 도장은 복(福)이 아니라 책임과 인격을 상징합니다.

대중들이 흔히 말하는 ‘복(福) 도장’에 대해 묻자, 명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도장은 재료가 예뻐서 가져가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름이 새겨지는 순간, 그것은 그 사람의 얼굴이자 몸이 됩니다.” 그는 왕의 몸을 대신하던 옥새(玉璽)의 원리를 설명하며, 도장은 곧 그 사람의 그림자라고 정의했다.

"많은 사람이 복이 들어오는 도장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지만, 저는 복을 가져다주는 도장은 없다고 말합니다. 도장은 찍는 순간부터 그 결과에 대해 죽을 때까지, 아니 3대에 걸쳐 책임을 지는 무거운 약속입니다. 정직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이름을 보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마음으로 찍는 도장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도장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대추나무를 소금물에 오랫동안 삶아 마음을 정돈한다. "단단한 대추나무에 벼락이 내리쳐 수분이 몰린 부위만 물에 가라앉습니다. 그런 귀한 재질에 글자를 새길 때, 저는 기술보다 문양에 더 많은 공을 들입니다. 한 자 한 자가 고통받지 않고, 네 글자가 합쳐져 하나의 아름다운 문양이 되도록 공간(포백, 布白)을 나누는 과정은 명장에게 수행과도 같다.

최병훈 명인의 인장 [사진=여원전인방]

- 기억에 남는 ‘신뢰’의 순간들

최 명장의 칼끝을 거쳐 간 이름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있었다. 1988년 당시, 한복을 입은 손님이 가져온 상아에 ‘김대중(金大中)’이라는 이름을 새겨주었던 그는, 훗날 신문 기사를 보고서야 자신이 대통령의 직인을 새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명장의 가슴을 울린 손님은 따로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도장을 파 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곧 죽고 없겠지만, 손자가 죽는 날까지 할아버지가 준 이 도장을 보며 자신을 기억하길 바란다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졌죠. 그때부터 도장을 함부로 파는 일을 멈췄습니다.”

도장은 곧 누군가의 그리움이자 기억이기 때문이다. 또한 관공서 업무를 통해 그는 약속의 무게를 체감했다. 노원구청 분구 당시 27개 과의 도장을 도맡으며, 도장 하나가 없으면 행정 업무가 중단되고 구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관은 약속입니다. 예산보다 중요한 것은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은 인장이 행정의 신뢰를 떠받치는 도구임을 증명한다.

작업사진 [사진=여원전인방]

-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인장을 고집하는 이유

사인이 도장을 대체하고 모든 것이 온라인화되는 2026년의 현실에 대해 명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인장은 법적 책임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그는 당사자 간 거래가 중심인 우리 문화에서 인장만큼 확실한 안전장치는 없다고 확신한다.

명인의 인생을 관통하는 문장은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남긴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말라 즉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는 솔직한 강의로 청중을 졸게 만들지언정 자신을 속이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내가 갔던 곳을 나중에 다시 갈 수 있어야 합니다"라는 그의 말은 평생의 기준이 되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명장은 평생 모은 자료와 작품들이 ‘쓰레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대한민국 명장의 이름으로 전시관이 만들어져 우리 인장 문화의 가치를 후세에 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14살 소년의 손에 쥐어졌던 작은 조각칼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이의 이름에 ‘책임’이라는 혼을 불어넣었다. 최병훈 명장은 오늘도 차가운 나무 위에 따뜻한 인생의 문장을 곧게 새기고 있다.

/수원=박상욱 기자(sangwook@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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