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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9> 지리산 연하선경, 하늘과 맞닿은 길③


세석에서 장터목까지⋯구름 사이로 펼쳐지는 비경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박성기의 도보기행]<9> 지리산 능선을 걷다② 편에서 이어집니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세석대피소를 뒤로하고 촛대봉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길은 완만하게 고도를 높여간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급한 오르막은 아니지만, 이틀째 이어진 종주의 피로를 안고 걷는 발걸음에는 작은 경사 하나도 가볍지 않다. 다리와 배낭은 무겁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맑아진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촛대봉을 오르며 뒤돌아본 세석평전. [사진=박성기 작가]

세석평전을 지나 촛대봉 직전에 세석습지를 만난다. 해발고도가 높은 지리산 능선 위에서 거센 바람과 긴 겨울을 견디며 살아가는 작은 풀과 여러 생명이 조용히 터를 잡은 모습이 경이롭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촛대봉. [사진=박성기 작가]

습지를 지나자 촛대봉(1,703m)이 모습을 드러낸다. 촛농이 녹아 천천히 흘러내린 듯한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수천 년 동안 비와 바람, 눈과 서리를 견뎌온 자연의 조각품이다. 지금은 안전을 위해 촛대봉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없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독특한 형상과 위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촛대봉을 바라본다. 말없이 서 있는 바위에는 인간의 시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리산의 긴 세월이 새겨져 있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촛대봉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촛대봉을 지나 연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에 들어서니 그림처럼 아름다운 길이 펼쳐진다. 이곳이 바로 지리산이 숨겨둔 최고의 비경 가운데 하나인 연하선경(煙霞仙境)이다.

능선 위로 이어진 길에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발걸음과 숨결, 저마다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길을 지난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를 품고 바람은 지금도 능선을 타고 넘어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연하선경은 계절마다 전혀 다른 얼굴로 사람을 맞이한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지리산의 풍경은 차마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연둣빛으로 물든 숲과 푸른 능선,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은 거대한 수묵담채화가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연하봉 가는 능선길. [사진=박성기 작가]

능선 너머 남쪽으로 시선을 보내면 멀리 사천 앞바다와 여수 앞바다가 아득하게 펼쳐진다. 아득한 바다가 손에 닿을 듯 다가오고 산과 바다의 경계는 어느새 희미해진다. 발아래로 깊은 계곡이, 머리 위로는 끝없는 하늘이 열린다. 산은 높고 바다는 멀지만, 이곳에서는 모두 하나의 풍경이 된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연하봉. [사진=박성기 작가]

지리산의 아름다움은 결코 가장 높은 천왕봉 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과 바람을 품고 멀리 남해의 푸른 바다까지 끌어안는 이 넓고 깊은 품에 있다. 나는 지리산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리산이 수천 년 동안 빚어낸 거대한 한 폭의 풍경 속을 조용히 지나가는 중이다.

연하봉(1,730m)을 지나 장터목으로 향한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가볍고 충만하다. 몸의 피로와 마음의 기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 그것이 긴 종주가 주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연하봉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연하봉을 내려서니 장터목(1,653m)이다. 지금은 천왕봉을 오르려는 산객들이 쉬어 가는 대피소가 자리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산청 시천 사람들과 함양 마천 사람들이 물건을 지고 올라와 장을 열던 고갯마루였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장터목대피소. [사진=박성기 작가]

저녁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장터목에서 천왕봉 방향을 바라본다. 내일 새벽 3시 50분에 출발해야 5시 16분에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 지리산은 아직 가장 찬란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깊은 어둠을 지나 새벽의 빛이 태어나는 순간, 그 찬란한 시간이 나를 기다린다. 하늘은 투명하고 별이 총총하다. 내일도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평안하기를.

[박성기의 도보기행]<9>종주의 정점 천왕봉에 서다④ 편으로 이어집니다

지리산 연하선경 경치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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